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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우주 배영 2017. 4. 1. 20:42





​​봄인데도 벚꽃이 없는 곳에는 어쩐 일이에요, 형. 그대로라니까요. 휠체어를 거뜬히 밀 수 있을 만큼 자란 것 말고는, 모두 그대로예요.

잿빛 하늘, 감흥 없는 도시. 화르르 녹는 태양, 태양마저 재색으로 보이는 환영, 이따금 색 빠진 풀밭에 구르는 나를 보기도 한다. 잔디를 한 움큼씩 뽑아, 엉망으로 만들며 누울 무덤을 애달게 찾는다. 머리칼에 붙어 나근나근 흔들리는 회색 잔디. 과연 색을 볼 수 없는 것일까, 파란 구름과 하얀 하늘처럼. 어리석게 색을 되찾는 짓은 하지 않는다. 회색보다 더 회색 같은, 우뚝 선 병원.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진 휠체어를 탄 사람, 아니, 형. 형의 환자복 위로 휘갈겨 쓴 내 이름. 감기인가 보다. 병원 앞 큰 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는다. 발끝에 피어오르는 시간, 형, 저는 개가 되고 싶어요. 작은 개가 되어서 깡마른 두 허벅지를 차지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작은 개가 될 수 있을까요. 덮는 담요에, 털을 잔뜩 묻히고 싶다. 털 알레르기에 마른기침하는 김태형이 보고 싶다. 벅찬 바퀴를 굴리는 가련한 손목을 핥아 주려고.

오늘은 나왔네요, 이틀 기다린 보상은? 내 정해진 자리, 형의 뒤. 우리 둘이서는 아무것도 없다. 휴지 뭉텅이는 어디에 쓰려고요. 손이 불편하지 않도록 푹신하게 마감된 손잡이. 아귀가 센 나 때문에, 바깥쪽 쿠션은 푹 꺼져 있다. 김태형은 말 않고 손 안 뭉텅이를 북북 찢어낸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입에 무거운 자물쇠를 걸 때다. 정돈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건조하게 밟히는 잔가지들, 유독 찬 바람. 휠체어를 잠시 세우고 실례를 범한다. 정면으로 담요를 여며 주었다. 하던 것을 멈춘 김태형은 내 정수리에 입술을 콕 찍는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볼을 살짝 장난스럽게 꼬집어 주었다. 김태형이 반색하는 회색빛 화단을 지나친다. 절로 느려지는 걸음. 느린 걸음과 느린 손. 느린 비. 비요일이다. 물줄기를 맞는다. 화단은 금세 촉촉해졌다. 길게 추락하는 물뿌리개. 형, 물 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생각 없을걸, 송송 난 구멍으로 자꾸만 삐져나가잖아.

김태형은 별안간 여러 갈래로 찢긴 것들을, 공중으로 흩뿌린다. 난데없는 행동은 곧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휠체어를 빠르게 굴리는 내가 있다. 지나간 자리에 듬성듬성, 김태형의 흔적이 남았다. 꽃비야, 정국아. 꽃이 보고 싶었어요? 휘날리는 게 보고 싶었어. 거센 바람에 착지하지 못한 채 텅 빈 공중을 부유하는 반면, 새까맣게 발자국이 찍혀 있는 조각도 있었다. 낙하하는 것들, 함부로 비참하다느니 지껄일 수 없다. 누군가를 위해 낙하할 수 있는가. 나는, 김태형을 위해. 정도 없이 빠르기만 한 템포를 지휘해 주는 김태형을 위해. 그리고 그렸다. 보여 주고 싶었던, 유색의 벚꽃 잎을. 투박하고 섬세함은 찾아볼 수도 없지만. 잿빛으로 바래기 전에 김태형을 만나야 했다. 어언간 종이 한 장, 끝이 불에 그을린 듯 색을 잃기 시작한다.

가장자리, 그래. 이게 본연의 색이었지. 또 수긍하고 만다.

굳게 닫혀 경각심을 부르는 금단의 영역. 병원의 꼭대기, 부서질 것 같은 김태형을 품에 안고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우리는 동시에 발을 들인 거지? 조심스레 휠체어에 앉혔다. 두 다리가 아래로 축 늘어진다. 연분홍을 잘 봐요, 형. 달가운 춘풍을 탔다. 둥그런 머리통, 뾰조록한 콧등에 내려앉기도 한다. 나의 욕구의 근원인 시원스러운 입술에도. 입술을 연분홍으로 물들인 것 같았다. 연분홍은, 얼굴을 얼룩덜룩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난분분한 종이 꽃잎을 넋 놓고 바라보는 김태형의 연분홍 위로 입술을 맞붙였다. 가로막고 있던 연분홍을, 꿀꺽. 휠체어에 의존하는 김태형은, 자꾸만 꺾이는 고개에 작게 신음한다. 한 손은 바퀴를 쥐고, 한 손은 앞으로 고꾸라질 것같이 위태로이 내 팔뚝을 잡고.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단물이 배어났다. 그야말로 긴긴 탐닉을 했다. 썩어 문드러진 속만큼. 종이 꽃잎은 썩은 속에, 깊게 뿌리를 내렸고 가지를 뻗는다. 목맬 준비를 하는 김태형. 나는 가지가 쉽게 부러지지 않도록 물을 듬뿍 주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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