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슙뷔 하얀 건반, 검은 띠

우주 배영 2017. 9. 2. 21:56




분식집, 망한 옷가게, 생선가게, 반찬가게 등등. 분식집 앞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고, 그 위로 몇 걸음 움직이면 태권도장이 있다. 태형은 운동이 끝나면 땀에 푹 절어서 피아노 학원 입구에 크게 자리한 피아노 구경을 하러 가고는 한다. 면밀히 말하자면, 큰 피아노가 아닌 학원생인 윤기를 보러 가는 거고. 태권도장에 다니건, 피아노 학원에 다니건 또래들이 우르르 몰리는 분식집에서 윤기를 처음 보았다. 하얀색 교복 니트가 유난히 잘 어울려서, 교복 차림에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가 퍽 잘 어울려서 넋을 놓고 떡을 먹다가 눈이 마주쳤다. 잠시였지만 저를 보고 질색하는 얼굴도 잘생겨서, 생면부지인 윤기에게 반했다. 나갈 쯤 거울을 보니 입가에는 양념이 다 번져서는, 더 가관인 건 이에 고춧가루가 꼈더라. 아, 왜 아무도 안 말해 줬냐고! 아직도 그때 일이 떠오르면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기왓장 15장을 깬다.

태권도장에서 제일 먼저 나와 가는 곳은, 모두가 향하는 분식집이 아닌 피아노 학원이다. 뚝 떨어진 기온에 무엇도 받쳐 입지 않은 맨 가슴팍이 추웠지만, 이게 도복의 간지라고 찬바람을 맞으며 들어가지도 못하고 학원 앞에서 서성인다. 실은 그날 이후로 떡볶이를 싫어하게 돼서 분식집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있었는데, 야, 진짜 안 먹냐?! 천진난만하게 떡볶이 컵을 들고 태형에게 달려오던 친구에게 안 먹는다고! 이쑤시개에 꽂힌 떡볶이를 필사로 피하려다.

헐....

태형과 태형의 친구가 굳어 버린 앞에는 윤기가 서 있었다. 새하얬던 니트에 떡볶이 국물이 휘황찬란하게 튀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줬다. 죄송, 죄송합니다! 정작 사달 나게 한 친구는 나 몰라라 줄행랑 쳤고, 태형만 남아 발을 동동 굴렀다. 젠장... 왜 항상 이딴 식으로 인상을 남기는 거지.... 불쌍한 김태형. 속으로는 땅을 치면서 허리를 숙여 연신 사과했는데, 둘 사이에 까마귀가 지나가는 듯했다. 제가 세탁해서 드릴게요, 진짜 죄송해요.... 거의 울면서 말하던 태형에게 비수를 꽂았다. 오늘은 입이 깨끗하네. 그리고 너 가슴 다 보여. 입은 건지 만 건지, 내 가슴을 보고 가요. 하고 있는 태형의 도복 옷깃을 여미고는 니트를 한 번에 벗어 품에 안겨 주고 유유히 사라진다. 미친, 씨발, 등짝 존나 넓어. 멋있어. 위용 뽐내는 검은 띠가 무색하리만치 한껏 더워진 얼굴로 멀어지는 넓은 등짝... 아니, 윤기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넘겨진 니트를 황금 도자기라도 되는 양 품에 꼭 안고 갔다.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풀썩 누워 밖이라 하지 못했던 니트에 코 박기를 실현하며 그래서 떡볶이 국물은 어떻게 해야 되지. 엎어 둔 휴대 전화가 울려서 보니, [아까 그 형이랑 어떻게 됨? ㅠㅠ 그 형이 내 이름 안 물어봤지?] 개새끼가....

빨랫비누로 박박 문질렀다가, 물에 한참 담구고 있어도 보고, 혹시 내가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게 아닐까? 마트에서 보이는 대로 집어 온 샴푸를 손바닥에 가득 짜 놓고 비볐는데, 어라, 안 지워진다. 당연하지. 엄마한테 알리자니, 또 왕창 혼날 터. 김태형 좆됐구나. 차라리 처음부터 건들지 않았다면, 체취라도 맡을 수 있었을 거야. 물난리가 난 욕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버린다. 다른 것도 아니고, 교복인데. 세탁소에 맡겨도 흐릿하게 남을 모양새인데, 이 형은 왜 교복이 흰색인 학교를 가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어울린다고 반했으면서.

평소보다 무거운 발걸음,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에 홀로 하복을 입고 체육관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일단 집에서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이따 어떻게 말해야 되지.... 걱정이 산더미로 쌓여서 기어코 관장님께 한 대 맞았다. 다치고 싶으면 그렇게 딴생각하라고. 관장님.... 한 대 더 맞았다. 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특별한 두근거림이다. 대충 구겨서 처박아 둔 하복과는 달리, 예쁘게 접힌 하얀 니트를 챙겨 온 쇼핑백에 살포시 넣는다. 세탁도 못한 주제에, 기분이라도 내려고. 일부러 시간 맞춰서 갔는데, 무슨 일인지 윤기가 나오지 않는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ㅡ일방적으로 알고 있음 무작정 쳐들어가서 민윤기 어디 있냐 묻기도... 아, 니트에 명찰 있지. 명찰을 구실로 삼을 심산이다.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울리고 들어가면서 태권도장과 풍기는 냄새조차 달라 긴장이 약간 풀렸다. 나 이 냄새 알아. 벤... 벤자민 향인 것 같아. 그건 영화 이름이고, 라벤더 향이다. 어쨌든 현관에서 까맣게 때 탄 맨발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태형에게,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서 어떤 일로 오셨어요? 묻는 것에 감동받았다. 우리 관장님이 이런 말투로 나를 가르쳤더라면.... 그, 저, 민윤기... 라는... 사람을.... 아, 윤기요? 이쪽으로 오세요~ 손짓하는 곳에는 실내 슬리퍼가 있었고, 슬리퍼를 신으면서 알았다. 연탄 공장 빨빨거리고 돌아다닌 개 발 같네. 종종걸음으로 살가운 어투의 선생님 뒤를 쫓았다. 방마다 들리는 현란한 피아노 소리, 앞 현수막에는 항상 ‘민윤기’ 이름 석 자가 최우수자로 올라가 있던데, 윤기는 피아노를 얼마나 잘 친다는 걸까. 여기로 들어가면 돼요. 가장 구석방이었다. 생각해 보니 폐쇠된 곳이잖아. 아이고, 난 못 들어가.... 노크는 하고 들어가야겠지. 피아노 연주에 묻혀 소용이 없어져 버렸지만.

누군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원래 자세가 그런 건지 앉은 등이 티 나게 굽어 있다.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건반을 부드럽게 훑는 희고, 길고, 단단하고도 얇은 손가락. 몸 앞으로 쇼핑백을 정직하게 들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기의 세계를 깨는 것만 같아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저릴 만도 한데 악보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 끝마무리를 지을 때까지 가만 서서 분주한 손을 보고 있었다. 피아노가 아니라 손끝에서 만드는 음 같다고, 벽을 건드려도 반듯한 음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음표들을 폐부까지 들이키고서야 말을 걸 수 있었다. 저기.... 아무래도 낯선 음성 때문인지 어깨를 흠칫 떨고 아, 너였냐? 피아노를 보고 있던 몸을 아예 태형 쪽으로 돌려 앉는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대. 그건 뭐야, 먹을 거?”

“무슨, 제가 먹을 걸 가지고 와요. 이거, 어제 그 형 교복... 인데.”

그러고 보니까 윤기가 교복 니트를 입고 있다.

“집에 하나 더 있었는데.”

미리 좀 말해 주지.... 물론 속으로 씹은 말.

“미리 좀 말해 주지요!”

이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

그래서 얼룩은, 지워 왔어? 묻더니 쇼핑백을 채간다. 세탁해 온다며, 왜 그대로야. 그걸 어떻게 지워요.... 우물쭈물 반문하자 이게 아주 적반하장이라고 딱콩을 때린다. 훔쳐 들었으니까 돈 줘. 내 연주 비싸. 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말이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둘이 있기에는 좁은 공간이라는 것도 망각한 채, 어느새 가까워진 거리. 그러니까, 확실히 가까워졌다고. 겉으로 보이는 거리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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