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민뷔 우주 온난화

우주 배영 2017. 11. 4. 22:22

​​


돌아보지 말아, 운명을 찾아낸 우리니까.

어느 나라 한 곳 빠트리지 않고 전역을 강타한 정체 모를 1022년형 전염병. 살아남은,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전염병을 ‘얼스 클리너(earth clean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대로 동그란 구에 기생하는 인간을 모조리 정리하고 난 뒤, 당연한 수순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감당할 수 없는 시체 더미. 전염병 이륙하기 몇 달 전, ‘대규모 이주’로 한창 떠들썩했다. 지식 발전 산증인인 과학자들이 몇 백 년 만에 푸른 행성 지구로부터 3억 7800만Km 떨어진 화성의 자기력을 이기는 연구를 성황리에 마쳤다는 속보가 곳곳에 뜨고, ‘대규모 이주’에 성공하게 된다면.... 단지 미친 과학자 집단의 허상이었다는 팩트는 비로소 우주선을 띄우기 전에 밝혀졌다는 비극. 첫 타자로 발표한 과학자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걷잡을 수 없이 생기고 말아, 허상일 뿐이란 반박을 내놓은 올바른 과학자는 총에 머리가 뚫려 숨을 거두었다고. 올바른 과학자의 이름은 김태석. 현재 썩어 버린 시체들을 화성으로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김태형의 유일하게 존경하는 인물인 아버지다.

현재 태형이 가진 옷은 수천짜리 선내, 선외 우주복이 전부이다. 참, 죄수복 같은 스트라이프 티 한 장과 와이드팬츠 하나까지. 산 사람들이 멀리 떠났어야 했던 화성은 악취로 고약한 시체들로 면적이 가득 메워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대규모 이주. 태형 씨, 태형 씨. 저기요, 김태형 씨. 김태형 씨? 아, 저기... 태형 씨. 이름 석 자가 사물같이 시각으로 보이는 형태였다면, 이곳저곳 다 닳은 채 어디 작대기 하나쯤은 지워져서 태헝이라든지, 타형이라든지, 대형이 되었을 거다. 예? 세 대밖에 없는 으리으리한 우주선에서 중력이 없는 곳임에도 붕 뜨는 느낌을 매번 받으며 땅에 발을 딛자, 고향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공식적인 업체는 아니지만, 또 비공식은 아닌 팀에 소속한 직원 하나가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아버지도 잃었는데, 스케줄을 공유한 사람이라고 멘탈에 타격이 오고 그렇지 않다. 하아. 그저 태형이 화성으로 나갈 일만 더 늘었다는 것이, 태어나길 불운이라는 말을 입증한다. 50명을 훌쩍 넘던 팀원 수가 어느덧 20명 안팎으로 눈에 띄게 감소되었다. 태형과 다른 둘은 화성으로 직접 나가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추잡스러운 시체들을 비행선체에 싣지 않는다. 하지만 전처럼 인원 유지가 되지 않는다면, 시체를 전국 각지에서 모아야 하는 일까지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쯤 감염될까. 모르는 사람이 듣는담 배부른 소리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터인데, 2층 벙커 침대에 누워 드높은 까만 우주와는 달리 따뜻한 색이 묻은 아이보리 천장을 보며 중얼대는 꼬락서니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1층에 눕던 동료를 잃고서도 끝까지 2층을 고집하는 이유는, 형광등 빛이 따뜻해서. 추위를 극도로 혐오하는 태형이 어째서 그 추운, 지구랑은 비교도 안 되는 추위를 두르고 있는 화성을 집처럼 왔다 갔다 하게 된 계기가... 가만 보자, 아버지께서도 열렬한 팬들이 있었지. 진짜는 모두가 알아보는 법이라고, 두텁지는 않아도 단단한 층을 이루는 팬 분들이 보기에 하도 측은했는지, 혹한에도 끄떡없는 특수 제작된 우주복을 몇 벌이나 선물해 주셨다. 우주복이 왜 택배로? 물론 태형에게는 비밀리에 착착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팬들 사이에서는 꽤 소문이 자자한 태형이 그렇게나 믿음직했나 보다. 결국 우리가 가지 못한 화성에, 태형이라도 가기를 바란 것도 있고. 저들끼리 야매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처음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것과는 급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버림받았고,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고, 하다못해 길바닥에 다리 박힌 전봇대가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환각까지 보았고, 모자람 없이 코와 입 주변을 맴도는 산소가 있어도 남들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들과는 급이 달랐지. 우주선에 처박혀서 365일에 하루 나올까 말까 한 수신기를 틀어 놓는 건, 한참이나 동떨어진 고요한 외곬을 걸었던 태형이라고 해도 시간과 공간이 없는 그저 경계, 차원의 경계에 붕 떴다가 무력하게 내려앉기는 죽을 만큼 여러 소모가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날 며칠이고 감각 없이 홀로 갇혀 버린 우주선 안에서도 사랑을 소모했다. 특정 대상 없이도 사랑했다. 다신 오지 않을 잔인한 것들에게. 나를 사랑하기까지는 5억, 10억 광년이 걸린다고 해도 느직한 억 광년을 사랑으로 채우겠나니. 이것저것을 사랑으로 밀고, 삶을 기쁨으로 견뎠다면 평행하는 세계에선 달라도 같은 김태형이 고통 받고 있을 거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늦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중력이 건네는 토스트를 받으며 생각했다. 365일은 형식상일 뿐이라는 것. 12월 31일엔 한 해를 어쩔 도리 없이 보내는 날이지만, 푸른 행성 지구에서도 중력과 시간이 없는 인간은 1월 1일이 되어 봤자 12월 32일일 수도 있겠다는 상념에 젖었다. 끝나지 않는 12월과 상실의 달. 이런 식으로 한 번씩 터무니없는 잡생각에 몸을 담그면 어떤 외로움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지구에 가면 세상 모든 달력을 뜯어 고치겠다는 쓸데없는 다짐을 한다. 잡생각에 꼬리를 물고 물다가 피가 맺혀 더 이상 이로 물 꼬리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외로움일지 권태일지 또 다른 무엇일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감정이 한바탕 휩쓸고 나면, 혹시라도 같은 면의 우주를 유영 중인 생명체와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뇌를 집어삼킨다. 평범한 하우스의 집 창문을 여는 거라면 모를까, 우주선의 문을 열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항상 문을 등지고 있는 편이다. 어느새 몸이 휙 틀어져서는 고민할 것도 없이 무거운 문을 돌려 열기 직전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확인 불가한 바깥에서는 무엇이 떠다니고 있을까, 무엇이 두 다리로 걸어 다닐까. 음울한 주제에 외로움을 느끼는 자신 같은 존재라면 진정으로 불쌍해할 수 있는 확신에 찬다. 사랑, 허구, 조명, 폐허, 악, 중립. 우주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어 줄줄 새어나가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 질식당하지 않고 하루를 연명하는 거지.

아직은 아니라고 염려하는 잠을 모셔 놓고 억지로 청한다. 눈을 감아도 감는 게 아니다. 눈동자는 위로 까뒤집어질 뿐, 감기는 건 눈꺼풀이다. 눈꺼풀로 시야를 완벽히 차단함을 따라 흑백 기억들을 한꺼번에 덮어 버리는 수는 없나. 나름대로 정이라는 걸 주고받아 본 동료를 잃은 슬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 속에서 세심한 소음을 들었던 순간. 무한한 암흑의 일부가 되어 어디에도 충돌하지 않고, 혼자가 전부인 차원에서 흔들림조차 없는 슬픔을 뛰어넘고 싶었다. 구부러져서 안쪽으로 말린 단풍이 하늘에서 내리기만 했어도, 이렇게나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긴긴 무성 영화를 찍는 듯했다. 서로가 유에프오로 보일만 한 외계인이 손을 불쑥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웨어 아 유 프롬? 한마디만 해 주었으면. 되도 않는 영어로 성심성의껏 답해 줄 외계인이 나타났으면. 여느 때처럼 화성에 도착해 능수능란한 솜씨로 뒤에 딸린 창고 개념의 문을 힘껏 열자 따로 옮기지 않아도 산사태처럼 와르르 쏟아진다. 터져서 재가 되겠지, 얼마나 뜸했다고 벌써부터 형체도 찾을 수 없었다. 줄지어 쏟아진 시취가 심히 코를 찌르는 것들을 안쪽부터 대충 밖으로 남김없이 버린다. 다한 생명은 어느 별이 되었을까, 영혼도 우주로 떠났을는지. 육신을 놓지 못하고 머리 위에, 혹은 어깨 위를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까맣고 심해가 날이 다르게 팽창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만큼의 생명이 하루 만에 깎여나가면 우주에도 별을 놓은 공간이 없겠지. 모든 형태를 수용하고, 어떻게 보면 골라서 받는 우주도 어쩌면 외로움을 타는 탓에 자꾸만 별을 들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차갑기만 했던 심해에 가난한 온난을 터지고, 내리는 불꽃들로 배를 채운다. 화성에 오면 메마른 시체를 투기한 후 늘 하는 일이 있다. 강박처럼. 새로운 흔적이 생기지는 않았나, 그 주변을 둘러보는 일. 땅을 딛기보다는 눈꺼풀을 덮은 것처럼 볼 수 없는 계단이 있다고 여기며 걷는다. 물 없는 곳에서 온몸을 헤엄치다 보면 무의식 중의 시곗바늘이 심장을 똑딱인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어, 어어... 씨발, 이게 돌았나. 그대로 두고 온 우주선에 문제가 생겼다. 계기판도 맛탱이가 간 듯 응답이 없었다. 충분한 양의 산소가 남아 있는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버릇처럼 마른세수를 했다. 우주 헬멧 위로. 한 바퀴만 돌고 오자. 일시적인 고장일 거야. 실감도 나지 않는 사태에 조급함을 뒤로하고 자기 위안을 했다. 목적지는 화성 뒤편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산소를 아껴야 하는데, 사실 못 돌아가더라도 발목을 붙잡을 남은 미련이 없었다. 어디 하나 멀쩡한 부분이 없을 만큼 땅이 꽝꽝 얼었다. 시체가 이쪽까지 굴러온 건가. 이곳에서까지 혼자인 건 쓸쓸할까 봐 더미 쪽까지 직접 옮겨 줄 심산으로 다가가니 맨몸, 그러니까 지구인 행색을 하고 있는데 추레한 꼴의 시체들과는 달랐다. 마치 안방에서 티브이를 보는 것 같은 자세와 움직임. 움직임...? 내딛던 발을 멈췄다. 고개가 움직인다.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온다. 지구라고 착각할 만한 자연스러운 움직임. 맨발, 노란 머리, 가는 눈. 뭐 해, 그 거추장스러운 옷 안 벗고?

너무도 똑똑히 들리는 한국어. 웨어 아 유 프롬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 애초에 외계인이 영어 구사할 리도 없었지. 하지만 한국어를 하는 게 더 이상하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벗, 벗어? 벗으라고? 유행하던 전염병은 사실 좀비 바이러스였던 것인가. 우주 좀비 출현이라는 특종을 들고 귀화해야 될지, 수만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아무런 상해 없이 해끔한 차림. 한 세트인 스프라이트 셔츠와 와이드팬츠가 노란 머리 외계인, 어, 좀비, 아니, 몰라. 걔랑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몹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도 모르게 여기가 어디야? 지구야? 물었더니 지구는 네가 살던 곳이고, 오로지 나만 있던 평행성이야. 화성이 아니래,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시체 투기한 놈이 되었고, 한동안 남자애를 놀아 주어야 했다. 태형 같은 방문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나. 뭐, 몸을 미는 기쁨을 느낀 건 도리어 태형이지만. 노란 머리 말에 따라 잘 시간엔 규칙 없이 추락하는 유성을 구경했다. 빛나는 것을 배로 돋보이게끔 자그마한 균열 하나 없이 매끈히 깔린 칠흑을 가로지르는 유성을 보면서도 저처럼 맨땅에 떨어져야지 했다만.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나중엔 소멸하고 말 몇 천 만 개의 유성을 눈으로 좇고 싶다고. 앞이 아릴 정도의 잔상이 남는데도 괜찮았다. 척박한 땅을 손톱으로 긁으면 얼음이 긁혀 나오는 게 꼭 유리 조각 같았는데, 알고 보니 얼어붙은 게 아니라 다이아랬다. 이것 좀 긁어 가도 될까. 쭈그려 앉아 올려다보는 태형에게 흔쾌히 허락했다. 그게 지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나 봐. 맞아....

“넌 누구야?”

“신이야.”

“웃기지 말고, 왜 신이 이런 버려진 곳에 있어.”

“내가 있으니 버려진 게 아니지.”

나도 거두어 줘, 버려졌으니까. 라고 말할 뻔한 걸 겨우 삼켰다.

노란 머리에게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가 신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봐, 왜 이렇게 네게 태초의 애정을 느끼는 걸까.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멸망한 지 꽤 됐는걸. 방향을 틀면 트는 대로 졸졸 따라갔더니, 팔을 베고 누워 바라보던 유성 못지않게 고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런 데에서도 꽃이 펴. 멈춰 선 곳을 바라보니 죽어 버린 큼지막한 유성 잔해 사이로 꽃 한 송이가 우직하게 피어 있었다. 은하수가 이루어질 때 한 송이씩 피어나는 꽃이야, 신기하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줄기를 꺾고는 태형에게 건넸다. 나는 이 꽃을 은하수라고 여겨. 그렇지 않아? 크기도 빛깔도 가지각색인 별들이 하나의 군단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는 은하수. 은하수 자체이며 우주가 담겨 있는 하나의 꽃에 시선을 박았다. 꽃이라 함은 시들면 본질을 잃고 마는데, 끝이 아득한 우주를 띤 꽃은 생생한 꽃잎을 두르고 살랑살랑 흔들리려나. 태형아, 그런데 있지,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어. 까만 배경 앞에 퍽이나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꽃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힘에 의해 우주가 우그러진다. 그 행성은 망했어, 다신 돌아갈 수도 없다고. 온전히 살아 있는 생명체조차 없단 말이야. 넌 돌아가야 해, 너만이 구할 수 있어. 내가 알아. 본 적도 없는 서늘한 얼굴은 등골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오늘까지야. 한숨 자고 돌아가. 서늘함에 굴복하지 않고 고개를 설설 내젓지만, 반항은 소용없었다. 늘 그랬듯이 유성은 떨어졌다. 기쁘지 않았다. 누운 머리 옆에 꽃을 두었다. 자칫 잠들 것 같으면 허벅지를 꼬집거나,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자고 일어나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싫어서, 우주선에서 지낼 적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잠을 몰아냈지만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꽃은 그대로였고, 꼼짝없이 이 행성과 작별해야 했다. 안녕, 다이아몬드 땅. 그리고 수만 개의 별, 유성, 저 멀리 보이던 행성, 나의 신. 밤새 함께하던 꽃을 매만진다. 한참 보이지 않던 노란 머리가 어디에선가 돌아왔다. 준비는 끝났어? 준비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형식적인 질문이다. 챙길 거라곤 우주 한 송이일 뿐인데. 안 가면 안 될까....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미세하게 들릴 만큼 작게 중얼거린다. 손목을 한 손에 움켜쥔 후 잡아끈다. 아픈 것은 깜빡 잊고, 멍청한 건지 이 손목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찬란하고 예쁜 것을 보여 주러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날 여기에 있게 두면 안 돼? 귀찮게 안 할게. 저 반대편에 있을 테니까, 제발. 뿌리치지 못하도록 더 단단히 잡는 게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멍이 들 것 같았다. 멍들어라, 제발. 더 세게 잡아 줘. 꽃송이를 들고 있는 손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줄기가 엉망으로 구겨지는지도 몰랐다. 어느덧 멀리에서 잊고 있던 우주선이 시야에 들어찼다. 노란 머리는 그때까지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생뚱맞게 풀썩 앉더니 손이 베이도록 온통 다이아인 바닥을 긁어낸다. 그, 그만해. 야! 손 좀 보라고! 이 정도면 돼? 태형의 진심어린 걱정마저도 못 들은 체 무시하고 긁어낸 다이아로 바지 주머니를 가득 채워 준다. 이제 가. 우주선은 고장 없이 작동될 거야. 잘게 말썽인 부분도 다 고쳐 놓았거든. 등을 떠밀기 전 스스로 탑승한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문 하나도 못 닫고 있는 걸 보고 손수 닫아 주려는 걸 제지했다. 안녕. 어느 하나 뒤틀림 없이 맞닿은 시선, 눈으로 하는 짧고 짧은 키스도 마지막이었다. 울지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억지로 짜내지도 않았다. 떠나기 전 당부했던 말대로 정상 작동되는 우주선 안에서 내내 후회했던 것은, 피가 철철 흐르던 손을 매만져 주지 못하고 왔다는 것이다. 언젠가 피는 멎겠지만, 그리움이 새나가는 건 어찌 막으려고. 한 편에 고이 접어져 있는 우주복. 부드럽게 유영하는 우주선의 문을 발칵 연 것은 충동이었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