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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도 벚꽃이 없는 곳에는 어쩐 일이에요, 형. 그대로라니까요. 휠체어를 거뜬히 밀 수 있을 만큼 자란 것 말고는, 모두 그대로예요. 잿빛 하늘, 감흥 없는 도시. 화르르 녹는 태양, 태양마저 재색으로 보이는 환영, 이따금 색 빠진 풀밭에 구르는 나를 보기도 한다. 잔디를 한 움큼씩 뽑아, 엉망으로 만들며 누울 무덤을 애달게 찾는다. 머리칼에 붙어 나근나근 흔들리는 회색 잔디. 과연 색을 볼 수 없는 것일까, 파란 구름과 하얀 하늘처럼. 어리석게 색을 되찾는 짓은 하지 않는다. 회색보다 더 회색 같은, 우뚝 선 병원.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진 휠체어를 탄 사람, 아니, 형. 형의 환자복 위로 휘갈겨 쓴 내 이름. 감기인가 보다. 병원 앞 큰 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는다. 발끝에 피..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처럼, 숨을 쉬고 있어도 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전정국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전정국과 나는 서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섯 번을 헤어졌다가 만났고, 지금도 헤어지고 있는 중. 그거, 진짜 웃긴 새끼다. 헤어지자마자 여자 소개를 받고 다닌다. 이 수법도 통하지 않으니까, 일부러 겹치는 약속을 잡는다. 거기에서 이제, 보여 주기 식 썸을 타는 거지. 뻔하다. 애걸복걸하기를 바라는 거다. 정국아, 형이랑 다시 만나자. 듣고 싶어 하니 한 번쯤은 해 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놀리고만 싶은지. 최고로 웃긴 게, 늘 미안하다고 잡는 건 전정국이다. 이런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다가 여든아홉 살이 될 것 같..
전정국에게 나는, 끽해 봐야 죽은 애인을 대신한 닮은 사람. 발버둥치고, 죽기 살기로 다리에 매달려도 딱 거기까지다. 추적추적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흙탕물에 구르며 비참해질수록 순정은 빛을 냈다. 김태형의 순정은, 빛내다 못해 발화한다. 호모 포비아였으므로, 철저하게 숨겼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둥, 알아챌 수 없도록 가장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목젖이 타는 것 같아서. 어, 자격지심에. 그럴 때마다 전정국은 응원해 줬고, 투정은 덤이었다. 왜 형만 연애해요, 나랑 이어 줄 사람은 없어요? 너무하네. 너를 사랑하려면 너무해져야 했다. 내가 더럽게 치사하고, 너무해 봤자 너는 못 따라가. 얼마 안 돼서 여자 친구 생겼잖아. 너는 이미 승리자였는데, 기어코 뭉툭한 발꿈치로 작아진 나를 짓뭉..
그럭저럭 추억할 만한 학창 시절이었다. 적당한 친구들, 겉 친구 같은 건 내가 싫어서 만들지 않았다. 등교 거부도, 글쎄. 내가 따라다니던 후배 전정국도. 천체 관측 동아리였다. 지금도 천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렸을 적 눈을 감고 우주를 생각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외계인도 믿었고, 유에프오도 믿었다. 매일매일 별을 하나씩 만들어냈다. 크기도 작고 발광도 위태로웠지만, 가장 사랑했다. 눈을 감은 검은 도화지에 형형색색 은하수을 쏟았다. 도화지를 겹겹이 붙이면 내 우주가 되었다. 젊음의 향유였다. 전정국과는 동아리에서 만났다. 신학기, 신입생 중 딱 한 명이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다들 우리 동아리는 지루하다고 기피하던데. 특이한 애라고 생각했다..
장전할 줄도 모르는 권총을 가지고 다닌다. 그 자체로 드는 위화감 때문에, 어린애들 호루라기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편이 훨씬 나았을걸. 그래도 김태형이 유일하게 총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 총 돌리기. 내 손 위에서 자유자재로 굴려지는 총을 보고 눈을 빛낸 게 시초였다. 무게가 꽤 나가는 총으로 온종일 손장난을 치더니, 뽀르르 나에게 와서 이것 좀 봐 달라고 떼를 썼다. 나왔다, 집중하는 입술. 다음부터는 무리가 가지 않도록 22구경의 권총을 테이블에 뒀다. 슬쩍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작고 가늘은 손목이었기에. 정국아, 이거 네가 둔 거지? 조용히 넘어갈 줄을 모른다, 김태형. 거리는 이미 쓰레기들로 넘쳐나 숨이 막혔다. 트이지 않는 시야와 썩은내로. 상대적으로 이목구비가 붙어 있는 쓰레기..
각자 현생에 치이느라 서로에게도 예민해질 만큼 예민해진 민과 태 별것도 아닌 이유로 또 다투게 됨 그것도 저녁 식사 도중에 태는 저녁을 먹고서 여유롭게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결국 다른 때와 똑같이 마찰을 빚게 된 게 속상하고... 형한테도 서운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버림 - 형,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나만 그런 것도 아니, — 쨍그랑. 민은 표정 없이 말도 없이 태가 하는 말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테이블에 거의 내리꽂듯이 놓음 그리고 피칠갑이 된 손으로 —헤어져, 그러면. 빈손으로 학교 현관에 서 있는 태 우산 ;ㅅ;.... —그렇게 쳐다보면 비가 그쳐요? 삼 초 준다. - 어, 어어?! 후다닥....
슙뷔 빼빼로 한 개 꺼내니까 옆에서 입 아~ 벌리고 있는 태 입속으로 넣어 주나 싶더니 줄까 말까 밀당 시전 김태형, 개 같다. 뭐, 뭐요...? 8ㅁ8.... 국뷔 정국아, 정국아! 오느을, 빼빼로데이자나? 하면서 장난스레 입에 빼빼로를 물고 얼굴 들이미는 태 하지만 아랑곳 않고 고개까지 꺾어 가며 한입 한입 당황한 태 국 어깨를 밀어 보지만 꽉 잡혀 있는 허리 때문에 벗어나지 못함 ㅋㅋ 빼빼로 한 뼘 남기고 입술이 닿아 버리고 마는.... 푸쉬쉬 빨갛게 익은 태 얼굴 그에 비해 아무렇지 않게 물 마시러 가는 국
보고 싶다 태의 통금이 세상에서 제일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국 ㅋㅋ 저녁 일곱 시 헤어져야 할 시간 조금이라도 더 보고 가자는 국 때문에 만류해도 꼭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는 국 벤치에 나란히 앉아 깍지를 끼고 보내기 싫다며 징징거리는 연하 국 받아 주는 그래도 어른스러운 태 —아, 진짜. 꼭 같이 살아야 돼요, 우리. —알아써어, 이제 버스 2분 남았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해요, 형. 걔 소식 안 궁금해. 이제는 아예 사람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태 어깨에 고개를 파묻어 버림 연신 가지 말라는 소리를 하면서 —전정구욱, 밖에서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잊었어? 주말까지만 자알 기다려. 우리 집 빈다니까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버스가 도착함 이럴 때만 빨리 오는 버스 우르르 몰리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