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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뷔 청춘

우주 배영 2017. 2. 18. 21:57




​우리, 징하게도 붙어 다녔지.
지금처럼 홀로 남겨진 시간에도, 네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여전히 코끝에 남아서, 나를 파고들어.
지배당하는 것 같아, 태형아.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후 완전한 외톨이가 되었다. 깨지는 접시를 보면서 내 인생이 깨지는 것 같다, 우스갯소리를 열 올리며 싸우시는 두 분 몰래 중얼댔었는데.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사회적 인식이 너무나도 후졌기 때문에, 나는 부모 잃은 새끼라고 꼬리표 달리는 게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나 같은 애 하나가 더 있었는데, 애들이 대놓고 손가락질하고 그랬거든. 그래서 이모에게 전학을 부탁했다. 짐짝이 요구하는 것도 많네라는 얼굴로 못 이겨 알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났다, 김태형.

미안하게도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인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잖아. 날티 나게 생긴 얼굴. 그때는 이렇게 말했었지, 같은 남자라고 잘생겼다는 말을 못해서. 그런데 꼭 그래. 제발 쟤랑만은, 제발. 간절하게 생각하면 더 빗나가는 거, 그런 징크스. 나에게 있었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김태형 옆자리에 배정되어 하는 질문마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 있었다. 좀, 생긴 거랑 다르게 개 같은, 아니, 욕 아니고 칭찬.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말똥말똥. 나에게 집중하는 눈을 뜬 것을 보고, 머리 위로 손 얹을 뻔했다가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았지.

친구, 그런 건 기대도 안 하고 갔다.
김태형은 원래 같이 놀던 무리를 버리기까지 하면서, 내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럴 때마다 옛 친구들은 애꿎은 나한테 눈초리를 보냈다. 걔네들은 김태형을 못 버려서. 무서워서 살겠나. 이러니까 내가 치댄 줄 알겠지만, 순전히 김태형 본인 의사였다. 나는 휘둘린 것뿐이었고. 좋지는 않은데, 확실한 건 나쁘지 않다는 것. 분명히 얘는 나랑 핀트가 달랐음에도.

새로운 학교에 적응을 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이모 집에서 나왔다. 밖에서 받는 눈총, 안에서는 더 심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빼닮은 나를 그나마 애틋히게 여기셨다. 그다지 위안은 안 됐고. 내 얼굴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대신 다달이 돈을 보내 주셨다. 애써 태연히 통장을 확인하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오직 종이와 숫자로만 이루어진 관계 같았다. 이제부터 혼자 살게 됐다고, 무심하게 이야기했더니, 김태형은 내 팔뚝에 찰싹 붙으며 방방 뛰었다. 너희 집에서 놀고, 먹고, 자고, 응? 매일매일? 응, 매일매일.

그냥 하는 말이 없다, 김태형은. 매일 우리 집에 온다고 했던 게 빈말은 아니었던 듯, 웬 짐을 바리바리 싸 왔다. 나름대로 처음 발을 들인 거니까, 집들이라고 짐을 풀며 신난 얼굴로 하나씩 꺼낼 때마다 설명을 덧붙였다. 이거는 계란, 김치, 사골국, 두루마리, 빤쓰. 어? 빤쓰, 너 입으라구. 커플 빤쓰야. 입고 있던 바지를 훌렁 내렸다. 집들이, 다 어머님께서 챙겨 주신 것. 나머지는 자기가 입을 옷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원.

새벽 탈출이라고 하나?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에 출석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같은 이불 덮고 잤고, 같이 일어나서 학교 가고, 나란히 지각하고. 새벽 탈출, 그것 때문에. 어차피 혼자 사는 집이라 탈출이라는 의미가 퇴색됐지만. 김태형은 좋아했다, 그런 걸. 감색 하늘, 하얀 달빛, 노란 치즈 색 가로등이 길목을 비출 때, 우리는 그 길목을 인사불성하게 가로지르며 뛰어다녔다. 나는 여름밤, 새벽 공기가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 김태형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면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나는 쪽팔려서 금방 김태형의 입을 막았다. 여름이어서 그런지, 새벽에도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아니, 네가 있어서 그런지 겨울에도 밝았었지.

좋았다. 김태형은 해를 거듭할수록 큰 의미로 다가왔다. 조금 웃긴데, 사랑, 그런 말이 아니다. 내 인생에서 의미라는 게 없었으니까. 김태형은 그 존재 자체로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왜 그랬었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고.

학교에서 소문이 돌았다. 박지민 김태형, 게이라고. 매일 후장 섹스를 하고, 서로 자지를 빨아 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만 아는 게 아니다. 김태형은 알고서도 멋쩍게 웃기만 한다. '소문'에 민감한 나는 치를 떨었다. 애들이 보는 앞에서 왁스를 마시고 죽을까 생각도 해 봤다. 그리고 나는 같은 피해자인 김태형에게 화풀이를 했다. 멍청하게. 멍청한 나, 멍청한 박지민. 김태형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쭉, 볼 수 없었다.

김태형이 투신했다. 투신자살. 예쁜 몸, 얼굴이 딱딱하고 차가운 도로에 뭉개졌다고. 김태형의, 어머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똑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방에 누워 있으면, 네가 내 몸 위로 다리를 턱 얹을 것 같아. 죄책감에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너 없이 어느새 3년을 보냈네. 나는 여전히 멍청해. 덜 멍청해지기 위해서, 너보다 더 아프게 죽으려고. 너를 잃고 나니까, 내 청춘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당연한 건가. 네가 청춘이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청춘을 앓을 일도 없겠지. 그때는 나도 모르게, 너를, 간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 내 징크스 탓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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