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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散華

우주 배영 2017. 2. 2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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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추억할 만한 학창 시절이었다. 적당한 친구들, 겉 친구 같은 건 내가 싫어서 만들지 않았다. 등교 거부도, 글쎄. 내가 따라다니던 후배 전정국도.​​​​

천체 관측 동아리였다. 지금도 천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렸을 적 눈을 감고 우주를 생각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외계인도 믿었고, 유에프오도 믿었다. 매일매일 별을 하나씩 만들어냈다. 크기도 작고 발광도 위태로웠지만, 가장 사랑했다. 눈을 감은 검은 도화지에 형형색색 은하수을 쏟았다. 도화지를 겹겹이 붙이면 내 우주가 되었다. 젊음의 향유였다. 전정국과는 동아리에서 만났다.

신학기, 신입생 중 딱 한 명이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다들 우리 동아리는 지루하다고 기피하던데. 특이한 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얼굴도 보고 싶었고, 나처럼 우주를 사랑하는 애인지 알고 싶었다. 개설할 때에도 난항을 겪었다. 다섯 명 이상이었어야 했는데, 한 자리가 부족했다. 꼼수를 썼다. 들어왔다가 나가라고, 그랬더니 동아리를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까였다. 그래서 동아리에는 천문학이 뭔지도 모르는 애 하나가 껴 있다. 일 년을 활동했지만 아직도 모르겠대.

신입생은 보자마자 합격이었다.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회장은 잘생긴 게 최고더랬다. 그런데 얘, 자기가 잘생긴 줄을 모른다. 워낙 낯가림도 심했고. 내 이름을 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렸다. 선배에서 형으로, 호칭을 바꾸는 건 일주일이 소요됐다. 선배라는 말, 듣는 내가 굉장히 어색했다. 이상하게 내가 후배라고 부르는 건 좋았다. 어이, 후배~ 하면 전정국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대답했다. 그게 꽤 귀여웠다. 부러 호출한 게 그 이유였다. 교실로 찾아가기도 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봤다. 몸, 쩔더라. 형, 오지 마세요. 제가 갈게요. 라고 했을 때, 왜인지 우주에서 빅뱅이 일어났다. 펑.

전정국,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식으로 대하는구나. 그 범주 안에 드는 게 나라고, 돌연 깨닫게 해 줄 때가 많았다. 동아리 애들 몰래, 동아리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항상 북적거리던 곳에, 둘만 덩그러니 남으니 묘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듯, 전정국은 땀이 배는 손바닥을 바지에 계속해서 닦아냈다. 어느 누가 너희 왜 긴장해? 묻는다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깜빡일 것 같다. 나도 내가 왜 긴장하는지, 무슨 일을 기대하고 있길래 긴장이 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말. 그 즉시 전정국은 추궁하는 키스를 했다. 정말 몰라요, 형? 말은 안 했지만, 그게 키스의 뜻이었던 것 같다. 예상보다 빠르게 빅뱅은 두 차례 일어났다. 소성들만 존재하던 우주에, 전부 전정국표 행성이었다.

은밀한 사이가 됐다. 첫 키스 후, 전정국은 나를 마주하기 힘들어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방과후, 교실을 비운 사이 나는 재빠르게 전정국의 휴대 전화를 들고 다시 올라갔다. 이렇게 하면 어쩔 수 없이 찾아오겠지. 그리고 내 망할 궁금증 덕분에, 알면 안 되는 것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빼곡하게 쌓여 있는, 나이 먹은 여자들의 메시지들. 이런 걸,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겉잡을 수 없는 쇼크가 몰아쳤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교실 뒤 거울에서 문 앞을 서성대는 전정국을 봤다. 휴대 전화 전원을, 껐다. 후배, 왔어?

형, 더러우면 더럽다고,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해요. 그냥. 떡볶이를 먹으면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치미뗐다. 바보 같은 게, 전정국이랑 멀어지는 건 싫었다. 그러고 다니는 게, 역겨워도 전정국이랑 멀어지는 건 죽도록 싫었다. 그랬다. 난데없는 내 마음이었다. 나는 너랑 키스하고 싶은걸. 그 날은 격렬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했다. 나는 전정국의 깃을 잡았다. 전정국은 내 볼을 감싸쥐었다. 손 안에서, 볼이 터져도 모를 것 같았다. 상가 도어에 비춰지는 우리가,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모습 같았다.

방학 때도 꼭 같이 다녔다. 더운 여름, 한적한 계곡으로 놀러 갔으며 나의 할머니 댁에도 내려갔다. 할머니는 전정국을 좋아하셨다. 나보다. 시골의 밤하늘은 성관으로 모든 별들이 촘촘히 엮여 있었다. 바닥에 벌러덩 엎어져, 흙바닥에 등이 더러워지고 따가운 줄도 몰랐다. 금성이 잘 보여요. 직녀성 견우성, 그리고 달은 말할 것도 없이 유독 빛났다. 우리 여름철 별자리는 다 봤으니까, 가을 겨울에도 또 보러 오자. 마주 보고 손가락을 걸었다. 최상의 로맨틱한 밤이었다.

벌써 개학이네. 후배,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지? 저는 몰라도 형이 걱정이에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나는 곯아떨어졌다. 허무맹랑한 개학 전 날의 밤이었다. 통화로 밤을 꼬박 새우고 싶었는데.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정신 없었다. 빨리 전정국 보러 내려가고 싶었다. 이제 고 삼이라고 놀리는 전정국을. 그리고 우리 동아리는 폐쇄될 듯하다. 3학년들은 동아리 활동보다 공부에 전념해야 하기에. 전정국의 생각으로 교실을 꽉 채웠다. 공기처럼 부유했다. 기다렸던 쉬는 시간,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 나갔다. 계단에서 넘어질 뻔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빨리 내달렸는데, 주인 없는 자리만이 나를 반겼다.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어.

예견된 이별도 아니었다. 속수무책으로, 전정국을 잊어야 했다.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며, 번호가 바뀌었다는 여자의 안내를 들어야 했다. 찌릿했다. 우주가, 소세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집채만 한 블랙홀이 모든 걸 삼켰다. 모든 게 빨려들어 갔다. 지금까지 꾸렸던 우주는, 처음과 같은 무(無)의 상태가 돼 버리고 말았다. 또 우주를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급격한 무력에 빠졌다. 허물만 남았고, 속을 긁어냈다. 내 속을 긁어내서 몽땅 가지고 간, 전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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