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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우주 배영 2017. 3. 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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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처럼, 숨을 쉬고 있어도 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전정국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전정국과 나는 서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섯 번을 헤어졌다가 만났고, 지금도 헤어지고 있는 중.

그거, 진짜 웃긴 새끼다. 헤어지자마자 여자 소개를 받고 다닌다. 이 수법도 통하지 않으니까, 일부러 겹치는 약속을 잡는다. 거기에서 이제, 보여 주기 식 썸을 타는 거지.
​뻔하다. 애걸복걸하기를 바라는 거다. 정국아, 형이랑 다시 만나자. 듣고 싶어 하니 한 번쯤은 해 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놀리고만 싶은지. 최고로 웃긴 게, 늘 미안하다고 잡는 건 전정국이다. 이런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다가 여든아홉 살이 될 것 같다. 전정국은 여자의 틀니를 닦아 주고 있을 거다. 어린 놈 땡깡, 받아 주는 데에 아주 도가 텄다. 그 주제에 나에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생기면, 동네를 다 뒤집으면서 찾아온다. 다른 사람에게 안기는 꼴은 못 보겠나 보지. 전정국 때문에 나가떨어진 문짝만 세 개. 나중에는 나도 저렇게 부서질까 봐 무섭다. 비밀번호도 알고 있으면서 굳이 그래. 나와라, 미친년아.

폰 줘 봐. 왜, 훼방 좀 놓지 마. 현관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말 거면 말든가. 나가. 싫어. 나가. 싫어. 나가라고 했다. 싫다고 했다. 나가, 전정국. 통화 기록 보여 주면. 골 때리는 새끼야. 그리고 꼭, 내 티셔츠 한 장을 챙겨서 나간다. 기념품이냐고 물었더니, 맞대. 내가 없는 집에서도 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게 좋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니까. 여자 친구는? 어제 제 황금 팬티 보고 도망갔어요. 으이구.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폼으로 내 다리에 머리를 뉘이고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귀자는 말이 너무 늦네. 형이 하든가요. 싫어, 그러면 내일 해. 알겠으니까, 과자 좀 앞에 놓아요. 혼자 먹지 말고. 이대로 두면 잠이라도 자고 갈 것 같은 기세에, 내쫓아 버렸다. 올 때 갈 때, 일관성 있게 요란하기도 하다. 전정국이 어지르고 간 것은, 남겨진 내가 정리해야 한다. 마음 구석구석 다, 모조리 헤집고 가면 솔직히 그 날 새벽은 오래 뒤척이다 잠에 든다. 너도 집에 가면 그래? 나랑 똑같이, 벽에 걸려 있는 내 옷가지들을 보며 얕은 잠을 자?

​아무리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도 몸이 춥다. 춥고, 띵하고, 뻐근하고. 이 불측지연한 삼 박자, 감기다. 깨고 나서도 뭉그적거리는 건 예삿일이지만, 손집게로 눈을 뜰 수 없게 괴롭히는 것 같았다. 베개 밑에 처참히 깔려 있을 휴대 전화를 찾는 것마저 미션이었다. 수많은 전화번호들. 매한가지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나 나나 다를 게 없다. 전정국, 나 아파. 대답도 없이 끊긴 전화. 매마른 입술을 축였다. 몇 분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었냐, 김태형? 죽고 싶냐, 전정국. 형 소리는 얻다 팔아먹었어. 한 손에는 봉다리를, 양말은 짝짝이로 신고. 비잉신. 살쪘네, 개무거워. 나도 무거운 내 몸. 지구 모든 중력을 내가 가진 듯하다. 부드럽게 뒤통수를 감싸고, 헤드에 기대게 한다. 일으킨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눕고 싶어져 길게 늘어뜨렸다. 약부터 먹자, 밥은 일단 생략. 알약을 한 번에 못 삼키는 나를 위해, 세 개를 번거롭게 나눠서 입에 넣어 준다. 물 한입, 알약 한입. 이렇게 세번을. 너를 삼키는 것 같았다. 입술에 닿는 뭉뚝한 손끝. 울컥이는 울대. 형. 왜. 발그레한 게 예쁘네요. 골 울려, 입 닥쳐. 사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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