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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알아. 나는 당신에 의해 태어난 기계라는걸. 사는 게 아닌 작동. 죽는 게 아닌 고장. 당신 이름으로 세워진 건물,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손에는 새하얀 장갑, 걸치고 있는 가운도. 모두 새하얗다. 달랑거리는 조각난 정신마저. 어쩌면 나보다 더 기계 같은, 감정의 움직임이 없는 당신. 이런 심술스러운 패악을 부려도 역으로 무안해질 만큼 무반응이다. 조만간은 목에 걸고 다니는 카드를 숨겨야겠다. 그런다면 나를 만나러 오지 못할까. 어떠한 수단으로든 보러 올까, 아버지, 아니, 남준 형은.

호칭에 대한 혼선은 끊임없다. 당신은 나를 V, 라고 깔끔한 발음을 하지만 V인 나는 여전히. 가르침도 받지 않았다. 왜 입력해 놓지 않았는지, 불편하게. 잘게 부린 투정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연구소 안의 새하얀 인간들에게는 쇳덩이라고 불린다. 좋게 쳐주면 잘 만들어진 쇳덩이. 주기적으로 목 뒤와 왼쪽 허벅지에 있는, 육안으로는 보기 힘든 판때기를 뾰족한 것으로 드러내 주어야 한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허벅지, 믿기 어려우리 만큼 감도가 좋다. 나도 놀랄 정도니까. 허벅지만이 아니다. 당신이 외로울 때 안겨 주기 딱 좋은 몸을 가졌다. 그런 쓰임새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허벅지와 엉덩이. 큰 입 구멍. 꼭 쇳덩이라고 부르는 인간들이, 정비랍시고 몸을 한번씩 더듬어 보려고 한다. 우웩. 구둣발로 새하얀 가운을 짓이기는 남준, 아버지. 나더러 인간을 해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면서. 몸통은 쿨럭거리며 바닥에 더러운 침을 흥건하게 적신다. 맞아, 나는 당신에게만 허락된 몸이니까.

지루함에 넓다란 연구소 안을 돌아다닐 때면, 친구들의 탄생을, 투명하게 비치는 유리로 생경히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인간의 기준에 무언가 어긋났다면 가차없이 아웃. 분해 작업은 끔찍하다. 더 끔찍한 것은, 아무래도 탄생 그 자체. 부쩍 연구소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잦게 한다. 열거되어 있는 망치, 서늘했다. 일반인은 캐치 못할 커진 동공, 당신은 나에게 말한다. 공포심을 느꼈구나. 공포심, 공포심이 뭐예요, 아버지? 바퀴가 삐뚜름한 간이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조립에 쓰였던 도구를, 내 고운 발가락에 들이댄다. 너에게 반항은 없어, V. 명령, 명령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씩 풀리는 몸, 귀로 삐그덕 소리가 들린다.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것이지만,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이 죽는 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형, 명령을 물러 주세요. V, 지금 네가 떠는 이유야. 공포. 이제 알겠니.

로봇보다 로봇 같은 아버지는 그야말로 냉철했다. 냉철함에 매치되지 않는 따뜻한 손, 뜨거운 속. 매 순간 닿을 때마다 한 번, 두 번 깨닫는다. 아버지는 엄연히 다르다고, 정교한, 그래 봤자 한낱 부품 속에 상주하는 나와는. 의지로 행하는 것들도 다르겠지. 내가 하는 것과 아버지가 하는 것. 쇳덩이에 불과하니까. 나누어 가졌으면, 아버지에게 뜨거운 손을 내밀 수 있다면. 뜨거운 손을 가지고 싶다. 뜨거움이 묻는 게 아닌, 안에서 소리 지르는 열. 결국 생각과 공포. 좋고 나쁨은 인간이 삽입하는 것이었으니까. 나가지 못하는 게, 자유 의지가 아니었음은 꽤나 서글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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