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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뷔

우주 배영 2017. 4. 8. 21:50




어​디에서든 웅크려 앉는 게 습관이 되었다. 웅크리고 있으면 거꾸로 세상을 품을 수 있다. 머리 위로 태양이 녹아 흐르고, 새벽은 늘 파르랗고, 눈을 뜨고 있는, 전파가 잡히지 않는 흑백 텔레비전. 의지에 상관없이 피를 토한다. 입가는 한낱 네발짐승처럼 선혈 범벅으로, 그것을 말끔히 닦을 수도 없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곳곳에 웅덩이진 핏물, 연달아 오는 공명은 나를 무능하게 만든다. 눈앞에서 녹색 공기 방울들, 연달아 덮치는 과호흡까지. 폐쇄하고 있는 철제문 너머에서 쿵쿵. 마지막으로 떠다니는 보랏빛 빗금을 만났다. 붙들어 잡고 있는 정신을 놓아, 3, 2, 1.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철제문 개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무색무취 알약 더미. 잠시 심장을 멈춘다. 여린 목구멍의 피맛을 맡는다. 희멀건 침대 밑으로 딛는 바닥은 차디차다. 발을 내밀었다가, 비릿한 피 냄새에 몰리는 상어들을 보고 다리를 거둔다. 상어 떼를 보고 나면, 근거 없는 두려움은 공황을 부른다. 한여름에 피어나는 납매 같다고. 아니면 너는, 몽중인인가. 김, 김태형. 정작 보고 싶은 꿈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기분 나쁘게 질척한 웅덩이에 퐁당 빠져 볼까. 빛무리지어서 상어를 몰아내는 것에 여념이 없다. 그것을 보고도 멀지 않는 눈은 형체를 쫓기 바쁘다.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언제 여기에서 나갈 수 있나요. 잃어버린 내 이름은, 언제 찾아 주실 겁니까. 벽에 대고 말하는 것, 대답은커녕, 언제나 그랬듯 컬러로 돌아온다. P-1030, 되도록이면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당신만 피로해진다니까요.

세상에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홍염의 손길에서 튀는 꽃불, 따갑지 않다. 겸허하게 받아낼 수 있다. 서랍에 비치되어 있던 잠옷을 꺼낸다. 마르고, 볼품없는 몸을 보여 줘야 하는 것, 그에게는 감추고 싶다. 그렇지마는 홍염의 손길에 저항할 수 없지. 낙인처럼 눌어붙은 핏자국이 말한다.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 역설적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발목, 육체를 가두는 하얀 방이 너무도 좋다고 거짓말을 담는다. 아이러니다. 확실한 것은, 그대의 테라스에 놀러 가고 싶다는 점. 몰상식하게 날것 그대로의 고기를 뜯어 먹은 모습을 연상케하는 입 주변을, 정성스러이 닦아낸다. 반쯤 갉아 먹힌 정신은 붉음 끝에서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황홀이 넘쳐흘러 패닉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봄이구나, 몰랐어요.

알약을 물도 없이 잘도 삼킨다. 이것 때문에 숨 쉬듯 피를 쏟고, 복통에 시달린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관련없는 불청객인 불면증. 귀를 막고서 새벽토록 짖어 운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든 말든, 나에게 중요치 않다. 그저 그의 이름 석 자를 입안에 굴리고, 뭉치고 싶었을 뿐이다. 김태형을 생각하면 상어 떼가 지느러미를 빠끔거리며 헤엄하는 심해도 되고, 한 결 한 결 부는 바람만 실재하는 황량한 사막도 된다. 새하얀 방에서 여러 곳을 여행한다. 종종 역광을 받기도 한다. 창문 한 칸도 없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꿈에서 앓는 불면증은 별게 아니다. 그는 결코 내 꿈에 나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계속, 계속해서 꿈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실로 어지러운 통각이 전체를 휘감아도, 꿈이라는 걸 굳게 믿고 있으리라.

오늘도 잠들 수 없어, 사막 같은 심해에 가로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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