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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뷔 첫여름

우주 배영 2017. 5. 20. 20:48



​1987, 조용하다. 마룻바닥이 삐걱이지도 않는다. 마음이 파래지게 부는 산들바람은 먼저 연갈색 머리카락을 훑고, 다음으로 스치고 지난 풍경. 짤랑, 귀를 간질이는 찬란한 소음. 작은 금속 붕어가 뒷들 초록 바다에 아가미를 벌컥 열고 숨쉰다. 초록 바다의 격류에도 몸 사리지 않는다. 꼬르륵, 머리에 창해를 이고 수면 위로 기꺼이 띄운 여름 잎. 억겁을 버틴 여름 잎은 가까스로 5월의 블루스를 춘다. 다다미가 깔린 방, 소박하게 마련된 부쯔마 앞에 발을 모으고 합장한다. 열린 창문 틈으로 길게 햇살을 울린다. むすんでひらいて…. 희미하게 들리는, 흐린 곳 없이 명랑한 목소리가 속눈썹을 굳힌다. 열 손가락을 딱 붙이고서 풍경 소리를 듣거나, 두부를 싣고 어정어정 달리는 트럭 소리를 들으면 샘에 고인 눈물이 빼꼼 나온 실밥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다다미가 짙은 색으로 덕지덕지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흐느낀다. 저물 때까지, 방을 지키고. 하얗고 투명한 자전거가 다다미 방을, 나를 감싸고 세 바퀴 돌 때까지.

吉原よしはら陽太ようた, 요시하라 요우타. 이름 그대로 햇볕을 닮은 애. 웃으면 귀엽게 올라오는 광대, 눈이 접혀 보이는 촘촘히 박힌 속눈썹이 비단같이 짜 놓은 듯 예쁘다. 여자애보다. 이름을 듣고서는 たいが, 타이거? 어흥! 익살맞은 표정으로 나를 웃기고.
​무늬 없는 곤색 하카마와 유카타가 잘 어울리더라. 덕분에 살별 없는 밤하늘을 봤어. 별의 석방을 받고도 돌연 빛을 내던 밤하늘. 입을 줄도 몰라 얌전히 등을 보이고 서서​​ 萩原はぎわら, 도와줄 거지...? 라고 묻던 게 꿈속의 꿈 같아. 게타마저 불편하다며 엄지발가락을 꼼지락, 그러면서도 불꽃 축제를 누비고 다닌 요시하라, 김태형. 고양이 가면, 그 사랑의 가면을 깨트리고 싶었다. 불꽃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어둠 껍데기 위를 수놓을 쯤, 귀에 걸린 가면을 벗기고 퍼부은 키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무수히 형형색색 폭죽이 터졌다. 혀에서 펑, 잘 다려진 파도색 심장에도 펑.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어쩔 줄 모르던 다른 손. 우리는 우리의 키스를 사랑했다. 종당 들고 있던 등불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칠치고 말 정도로. 불꽃에 하늘은 익어 갔다.

요시하라의 하얀색 자전거 앞 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에 자리잡고 낮잠을 자는 갈색 길고양이, 앳된 두 손에서 형체 잃고 녹아내리는 소다 맛 막대 아이스크림. 반팔 밑단 팔꿈치까지 흘러서야 맞붙이고 있던 입술을 뗐다. 키스라기에도 웃긴, 우리는 우리의 키스를 사랑했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상기된 얼굴로 묵묵히 자전거에 오른다. 뒤에서 보이는 요시하라 귀끝이 빨갛다. 잘 익은 붉은 열매처럼. 귀끝 말고도 뒷목 전체가 빨개진 걸 보면 페달을 굴리는 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자전거를 굴릴 줄만 알았다면 뒤에서 측면으로 보이는, 해수면 위로 소금을 자글자글 쏟은 것 같은 바다를 구경하게 할 텐데. 하기와라, 바다로 갈래? 대답 대신 귀를 만져 주는 걸로 대신했다. 보이는 만큼이나 뜨겁지는 않았어, 그런데 지문은 왜 이렇게 홧홧하지.

되는 대로 바닷물에 진득거리는 팔을 푹 담갔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아스팔트 도로, 대신 아스팔트에는 오후를 지나가는 여름 꽃 아지랑이가 흐무러지며 개화한다. 있지, 더 이상 일본에 머물 수 없게 됐어. 말을 끝으로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성난 파도에 떠밀리는 듯했다. 코를 아픈 바다에 처박힌 채로, 파도에 결박당했다. 천체가 쏟아지고, 기울어져서 손을 뻗어도 잡지 못하고 등으로 떨어지는 요시하라, 열일곱 김태형. 모든 구멍을 열고 바다에 잠겨 발버둥하는 머리통을 아래로, 아래로 꾹 누른다. 그래서 아직도 오르지 못하고, 해초에 감긴 발목을 자르지도 못하고 거꾸로 서 있나 보다. 파란 바닷속에는 자전거, 고양이, 폭죽, 아이스크림, 여름과 붕어도 증발되어 잠긴 불운만 대롱대롱 매달렸을 뿐이다. 운하에 묻기로 한다. 해수를 쌓아서, 출렁이지 못하게 쌓아 놓고 다시는 회상 않게, 돌아보지 않게. 지우개로는 흑연으로 만든 이름을 박박 지운다. 이름을 지우고, 생긴 가루를 낭자하게 입에 털어 버린다. 너, 다시는 일본으로 건너오지 마라. 이전에 나를 살다 갔으니.

정맥을 끊고, 괴어 있는 것들을 텅 빈 밤에 차곡차곡 채운다. 구부러진 밤이어도, 의심스러운 밤이어도 피어서 왁자히 머리 맡을 흩날린다. 온몸으로 바다를 구르는 꿈을 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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