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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뷔 放課後

우주 배영 2017. 5. 2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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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멈췄다고 시간도 멈췄을까, 뒤로도 갈까. 시계를 고치지 않는다. 뒤얽힌 시간 속에 머물 수 있게, 갇힐 수 있게. 멈춘 오전, 니은에 걸터앉아 창을 옆으로 밀어 연다. 먼지 구덩이와도 같은 창틀, 벌레들은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져 푸슬한 먼지 이불을 덮은 채 어떤 봄눈이 세차게 휘날리는지도 모른다. 둥글고도 모난 눈무덤 위 몸을 뉘인다. 얼굴, 가슴, 배, 다리. 죽죽 날리는 눈발에 무덤 주인은 내가 된다. 봄눈은 시간이라, 그렇게 두두룩 폐에 쌓여 호흡하는 코 입으로 우리를 내쉰다. 틈 없이 손가락을 딱 붙이지만, 회고는 한 줌 잡히는 법 없다. 노엽게도 작은 비명은커녕, 허연 공백만을 남긴다. 아래로 깊은 공백, 살점을 이로 물어뜯고 푹 파인 살 밑을 엄지로 꾹 누른다. 하얗게 질릴 때까지. 선혈이 배어 나오면 설원 같은 공백에 소실점을 만든다. 감각 잃은 손끝은 다른 손끝과 닿아도 알아채지 못한다. 닿음을 그렇게 갈망했으면서. 온기를 그렇게 원했으면서, 끈적이는 핏물이 괸 웅덩이를 만들 뿐이다. 새빨간 웅덩이에 비친 어린 두 손.

주기적으로 삼 일, 김태형은 잘 보이게 엉덩이를 치켜들고 손으로 벌린다. 볼기가 벌어지면 짓물려서 피딱지가 앉은 엉덩이 구멍이 보인다. 손가락에 듬뿍 올린 불투명한 연고를 주름에 살살 발라 준다. 아으으, 이것마저 폭력으로 다가왔는지 누런 장판에 눌린 볼을 비비적대며 아픈 신음을 낸다. 어쩔 수 없어, 참아. 느리게 끄덕이는 고개가 가엽다. 또 아픈 데 없어? 응, 이번에는 안 맞았거든…. 술 몇 병 사 가야 해? 안방에서 어머니 지갑을 뒤적일 동안 김태형은 꾸물꾸물 옷을 주워 입는다. 열 병이면 될 것 같아. 그, 지민아.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눈물을 참는다고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한다. 푹 한숨을 한번 쉬고, 유약한 김태형을 얼싸안는다. 힘을 주면 바스라질 것 같은 야윈 몸, 힘을 다해 안지 않는다. 미안해, 나를 알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부정할 수 없다. 그래, 너를 몰랐다면 좋았을 거야. 하지만 알고 나니 더 좋은걸.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넘기는 말, 억지로 삼킨 말에 밤새 체기로 시달린다. 언제쯤 가볍게 소화시킬 수 있을는지, 남들은 재수없다고 욕하는 얼굴을 보면 속이 울컥인다. 박지민이 없었담 몸을 팔아서 악착같이 술 살 돈을 벌 김태형. 너도 나를 만나 다행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집, 꼭 누구를 보는 듯하다. 김태형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마주한 짐승 한 마리, 나도 모르게 전봇대 뒤로 숨고 말았다. 습격하러 가는가 보다. 허름한 집에는 김태형이 있는데. 걸음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를 김태형이 있을 집으로.

벌벌 떨리는 다리, 황폐한 집 마당에 즐비한 술병 하나를 집어든다. 주둥이를 잡고 있는 손이 땀에 젖어 축축하다. 미끄러질지 몰라 고쳐잡고, 신발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습격은 벌써 시작됐는지, 여린 숨소리와 흉폭한 숨소리가 한데 섞여 들린다. 손에서 술병을 일부러 놓치고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지만, 가까스로 참아낸다. 기회는 단 한 번, 이마에서 타고 흐른 땀방울이 앞을 가린다. 살짝 열린 문. 몸을 비스듬히 틀고, 방으로 들어가는 도중 짐승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초식 동물과 눈이 마주쳤다. 살육 현장. 술병을 들지 않은 가벼운 손으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니 몸이 흔들리는 건지, 슬쩍 고개를 끄덕인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둔탁하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번뜩. 짐승이 아닌, 김태형의 부친과 초식 동물이 아닌, 풀어헤쳐진 김태형. 교복 와이셔츠에는 핏방울이 마구잡이로 튀어 자아낸 잔혹함. 대가리가 터져 초록 조각이 듬성듬성 꽂혀 쓰러진 짐승을 한쪽으로 밀고, 김태형을 추스려 준다. 지민아, 너 손 떨려, 엄청…. 그런 건 모르는 척해 줘. 두꺼운 목에서 일어나는 경련, 죽은 손가락이 잠시 까딱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키우던 강아지를 묻어 둔 곳 옆에, 또 다른 구덩이 하나. 찝찝한 교복을 벗지도 않고 삽질했다. 세게 잡은 나무 손잡이에 가시가 꽉 박힌 것도 모르고. 흙으로 신발이 더러워져, 집에 가면 어머니께 혼날 걸 알고도. 웅크려 앉은 김태형은 끝끝내 건드리지 못했다. 벌써 너한테 아빠 냄새 나는 것 같아, 라는 말을 듣고. 꾸밈없는 살인자다. 얼마만큼 무거운 딱지가 붙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 나를 무서워하는 김태형이, 나는 그게 더 두렵게 닥쳐온다. 무서워하지 말자. 우린 하나야. 피 묻은 교복은 벗어서 버리면 돼, 태형아. 손은 씻으면 돼, 삽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돼. 뭐가 문제라고 그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김태형. 마침 꽃가지를 주워 들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태형아, 이것 봐. 너를 닮은 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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