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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물, 위에도 물. 몸을 마구잡이로 덮치는 물들에 어느 구멍으로 밀려 들어가는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쾌청했던 하늘을 가르는 번개와 천둥이 쾅. 물 밑으로 푹 잠겼다가 눈앞이 번쩍거리고, 한참이나 부족한 공기를 한시바삐 들이킨다. 누군가 아래서 발목을 잡고 있는 듯했고, 아니면 가라앉도록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도 같다. 허파에 생긴 작은 바다가 출렁인다. 몰아치는 파랑, 팔이고 다리고 온몸을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이 감당할까. 흡, 흐악, 헉, 살려, 푸학, 주세요! 살려, 주, 아흑…. 발 닿을 데 없이 깊고, 아득한. 머리 위로 한차례 바다가 퍼붓는 파도. 그리고 푹신한... 이불. 꿈, 꿈이다. 범상치 않은 악몽으로 인해 땀으로 흠뻑 젖고만 머리를 쓸어넘긴다. 이마까지 젖어 있었다. 안 그래도 무더운 날,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낸 건지 시트까지 축축했다. 마치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다 온 사람처럼. 지민은 물먹은 솜만큼이나 무거운 몸을 겨우 추스리고, 악몽을 떨치지 못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작게 딸려 있는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별안간 왜바람의 등을 타고 들어온 진한 바다 냄새가 작은 방을 채운다. 잔잔하니 출렁이는 바다, 몸을 뒤덮는 짠내. 창문을 활짝 연 채로 태건을 삼킨, 흉악한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갈매기와 이중창을 부르는 바다를 숨죽여 바라본다.

수년 전, 김태형의 친형 태건과 천진난만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바다 마을에서 나고 자랐기에, 바다는 유일한 놀이터였으므로 아이들에게는 바다만큼이나 친숙한 게 없었다. 태형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가 붙어 다른 날과는 다르게 지민과 태건 단둘이 바다로 향했다.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는 모래사장에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여벌 옷도 없이 퐁당. 배고픈 줄도 모르는 둘은 물장구를 치거나, 아예 뒤로 드러누워 물속에서 누가 더 숨을 오래 참는지 따위 시덥잖은 시합을 하던 중, 금세 해가 졌을 리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어두워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끼어 당장이라도 장대비가 투두둑 쏟아질 모양이었다. 지민은 젖은 티셔츠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힘겹게 짜내며 형, 우리 이제 집에 가자. 태건을 쳐다보았지만, 날씨 때문에 그러냐는 타박과 지민을 물에 빠트렸다. 평소라면 짓궂은 장난을 맞받아쳐 주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바닷가에서 비는 큰 불안, 주저 그 자체였음에 머리 끝까지 함빡 담궈졌던 지민은 버럭 화를 냈다. 그 사이에 파도가 거세져 몸체가 바다와 한몸이 된 듯 크게 출렁일 정도였다. 꽤나 멀리 왔기 때문에 백사장까지 단번에 헤엄쳐 가기가 험했다. 바람 소리, 서서히 잠기는 몸에 지레 겁먹은 지민은 소리를 질렀다. 태건에게. 형이 밀치지만 않았어도! 그제야 상황을 읽은 태건도 급격히 굳어진 표정으로 지민을 끌었다. 비라도 쏟아지지 말아라, 빌고 빌었던 것이 무색해고 말았다. 곧이어 빗방울이 수면 위로 낙하해 작은 파동들이 일기 시작했다. 물에서 물로 떨어지는 것들. 그때, 지민의 옷자락을 세게 부여잡고 있던 손이 크게 첨벙이고 지민아, 지민아!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빗소리에 묻히기도, 파도에 먹히기도 했다. 힘겹게 억센 물살을 뚫고 태건을 향해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태건이 아닌 지평선이었다.

지민은 닻을 놓으러 오신 아저씨들 덕분에 겨우 구조되었고, 태건 없이 홀로 돌아온 지민에게 우리 형은 어디 있냐고 묻는 태형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이후로부터 끊임없는 연속적인 자책뿐이었다. 태형은 지민을 원망하기보다 어둠이 깔리면 달랑 베개 하나 들고 와 밤을 같이 보내 주었다. 꿈에 시달리지 않던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더 이상 태형이 없으면 안 될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나마 지민이 웃어 보일 수 있다면, 꿈에서라도 태건이 아닌 자신이 빠졌다는 것. 다 큰 지금도 지속되는 악몽은 폐가 되지 않았다. 그저 태건을 대신하여 살아가는 동안 값을 치룰 뿐이라고. 밤마다 찾아오던 태형을 보냈다. 태건의 동생인 태형을, 짝사랑한다는 것조차 죄가 되어서. 가끔 허무하게 웃는다.

​아, 덥다. 에어컨이 불통인 바람에 당분간은 전원도 못 켜게 되었다. 선풍기 두 대를 세우고, 그 앞에 모로 누운 태형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받친 후 일으켰다. 누워서 먹으면 체한다, 김태형. 반쪽짜리 수박을 사이좋게 한 숟가락으로 퍼 먹다 말고, 누워 있던 자신을 억지로 일으켜서인지 쭉 짼 눈으로 지민을 노려본다. 나는 누워서 먹고 싶단 말이야. 안 된다고 했다. 태형의 골치 아픈 고집도 고집이지만, 한번 밀고 나가면 꺾을 수 없는 지민의 강단도 만만치 않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심술 돋친 태형은 한쪽만 퍼 먹어 판판한 면을 괜히 숟가락으로 난도질한다. 먹을 걸로 그러면 안 되지.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빼앗아 먹기 좋은 한입 크기로 푹 퍼서 태형에게 먹여 준다.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 그래도 수박은 받아먹네. 아, 박지민 오늘 짜증 나! 뒤로 열댓 번은 더 먹여 주고 나서야 풀린 태형은 얌전히 앉아 있다 옆으로 풀썩 누워 버렸다. 에어컨, 언제 고쳐.... 너무 더워. 알맹이를 싹싹 긁어 먹어 껍질밖에 남지 않은 수박을 치우며, 더우면 바다 갈까? 잠시 말 없던 태형은 전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안 좋아하잖아. 치우느라 과즙에 끈적이는 손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혹여나 물소리에 목소리가 묻힐까, 지민은 목청을 키웠다. 네가 가고 싶다면 가지. 우리, 바다 안 간 지 오래됐잖아.

해변으로 향하던 내내, 태형은 안부를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돌아갈 거면, 지금 돌아가자. 괜찮다니까, 바닷가는 시원하잖아. 너 덥다며. 잠깐 사이에 삐뚤어진 태형의 볏짚 모자를 똑바로 씌워 주고는, 앞장서기까지 했다. 솔선하지 않으면 손목을 잡아끌고 유턴할 태형이어서. 근 8년 만에 온 바닷가는 흘러간 시간이 무의미할 만큼이나 변함없었다. 여전히 철썩이고, 머리 바로 위로 갈매기 떼가 날아가고, 슬리퍼 안으로 모래가 들어와 아프게 밟히고. 바닷바람이 시원하다는 것도. 태형은 곧장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사장을 걷는다. 조개껍데기에 베이기라도 할까, 지민은 노심초사하게 바라보다 이내 곁으로 걷는다. 닿을 듯 말 듯한 손. 간지럽게 거슬려서 덥석 잡아 버렸다. 역시나 태형은 자각하지 못하고 쾌적한 바람에 양팔을 벌린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밀려나고, 맞잡은 손에 힘을 싣는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비단 태형과 손을 잡은 이유가 아니었다. 바늘 한 묶음으로 찔러대는 듯한 고통, 심장 박동을 주체 못한 지민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손을 놓았다. 놓은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고,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버텼다. 야, 박지민! 너 왜 그러는데! 거슬리는 모자를 벗고, 목 뒤로 넘겨 지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래, 도대체….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각에 식은땀까지 흘리는 주제에 태형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며 걱정스러움에 눈물을 가득 매단 태형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다. 왜 울어, 나는 괜찮은데, 네가 왜 울어. 밀물로 발목이 다 젖어서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심장을 태우는 고통이 가실 때쯤, 태형도 울음이 차츰 멎었다. 하지만 여파가 남아 잘게 딸꾹이는 등. 두개골까지 흔들리는 아픔까지 수반된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그날을 기점으로 성가시게도 괴롭혔다. 악몽을 꾸지 않는다. 더 이상 꿈에서 태건을 볼 수 없다. 식욕이 늘었다. 몸 상태가 어떻느냐며 소매를 붙잡고 재촉하는 통에 열 가지를 세 가지로 추려서 말했다. 간추려서 말했는데도, 태형은 울상이 되었다. 그때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선수 쳤다. 또 울려고 폼 잡지. 네가 울면 나도 울고 싶어져. 물론 쓸데없는 뒷말은 알아서 삼켰다. 너 진짜, 아프지 마.... 너까지 잃기 싫어, 박지민. 정신이 흐려진다.

​태형아, 자꾸만 바다가 불러.

요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민을 보러 간다. 오늘도 영락없이 두 손 무겁게 먹을 것을 들고 지민의 집으로 향하는 태형. 모퉁이를 꺾어 들어가는데, 어라. 박지민이다. 박지민이 분명한데, 어디를 저렇게 뛰어가는 거지. 게다가 맨발 차림으로. 이상했다. 소금기 싣은 해풍이 분다. 가득 들고 있던 쇼핑백을 그대로 두고, 지민을 뒤쫓아 뛰었다. 지민을 따라 뛰어 도착한 곳은 바닷가였다. 달뜬 숨을 몰아쉬며, 멀리서 지켜보았다. 밀려오는 바닷물 앞에 죽은 듯이 서 있다가 대뜸 바다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태형은 쉴 새 없이 내달렸다. 야, 박지민! 미친 새끼야, 뭐하는 거야, 씨발! 야! 옷이 젖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발이 푹 푹 들어가 넘어질 뻔했지만, 중심을 잡고 지민에게 다다랐다. 손목을 붙잡자 멈춘 걸음. 대답, 좀 해, 새끼야. 너 뭐냐고, 지금.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몸이 바윗덩이처럼 무거웠다. 박지민, 야... 등이, 너 등이.... 입고 있던 등 부분의 옷이 투둑 소리를 내며 튿어졌고,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등 부분이 전부 스며들어 아예 맨살이 보였다. 옷으로 모자라 살을 뚫고, 검고, 크디크고, 단단한 날개가 솟았다. 날개가. 태형은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검은 수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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