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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가 있어서, 귀신을 본다고 했는데. 지민은 괜스레 기분이 찝찝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으면 건드리기도 뭐해서.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지민은 옆에 두었던 카메라를 챙긴다. 태형 씨, 버스 왔어요. 태형의 공황을 깬다.

아역 배우로 입지를 넓히고, 국민 남동생에서 국민 연하남으로 등극.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뛰어난 표정 연기, 경력 30년쯤 되는 몰입력. 연기 자체로만 톱스타 타이틀까지 따낸 남자. 물론 얼굴을 빼놓을 수가 없지만. 거품? 인성 논란? 그런 건 모르겠고, 그저 탄탄대로였는데. 지민과 동갑인 신예가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한다. 혜성처럼... 그래, 혜성처럼. 바닥부터 올라오지 않고,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번쩍 등장했으니, 혜성이라는 기명이 퍽이나 어울렸다. 소속 사장님께서 일러 주시기를, 칼 갈고 나왔단다. 스폰서를 등에 업고. 스폰서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보기는 했다만, 같은 선상에 오르내리는 신예가 스폰서라니. 그때부터였다. 고개를 처들고 위만 보던 톱스타 지민이 어느새 수직 하락을 하기 시작한 게. 아무래도 이미지가 겹치다 보면 한쪽은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어 있다. 지민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고 지민의 뿌리가 가냘프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단단한 뿌리를 한 번에 잘라낼 만큼 막강한 병기를 가지고 있던 거겠지. 병기는 스폰서였고, 지민은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링 밖으로 아웃. 당초 지민에게 들어올 작품은 혜성에게 넘어갔으며, 지민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본인마저 전부를 홀랑 빼앗겨 버린 껍데기라고 생각하는데, 대중들은 오죽할까. 서서히 잊혀졌다. 텅 빈 스케줄을 보며, 때 아닌 휴가를 받았다고 마지못해 웃었다. 어릴 적부터 키워 주신 사장님이기에, 사이에 딱히 격식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형, 하고 불렀다.

해외로 도망치듯 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오로지 사장님. 그러니까, 형밖에 알지 못한다. 지민은 염증이 났을 뿐이다. 저지른 모든 일에는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을 잇따라 하셨던 아버지, 죄송합니다. 막중한 무게를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다. 지민은 때와 흐름을 잘 읽는 편이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서가 아니라, 본래 그러했다. 그러므로 위치에서 비켜 준 것이다. 걔가 지민을 밀어낸 후 꿰찬 것이 아니고. 해외 땅을 밟아 본 적은 꽤나 되지만, 로케이션으로 인한 비즈니스가 다였다. 어떤 계획으로 멀리까지 나왔느냐 하면, 저 구석으로 가는 게 목표다. 처음부터 명소를 보러 온 목적이 아니었다. 연기 없는 자신을 찾으려면 일단 여유와 마음을 찾아야 했다. 옷 몇 벌, 넉넉할 만큼의 현금, 카메라. 끝. 돈을 두둑히 챙겨 온 과거의 자신을 칭찬한다. 택시 타기도 전에 깡패 현지인에게 삥을 뜯겼고, 택시 운전사에게도 뜯겼다. 돈 벌기 참 쉽지, 씨발.

마이너스는 금방 상쇄되었다. 길바닥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 대가로 돈을 받은 건 아니고. 한국에서 그토록 원했던 휴식에. 온갖 것을 나 몰라라 내던지고 왔지만,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저기요, 저기요! 트일 뻔했는데....

"야,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
"저 부르신 건가요? 사인 안 해 드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얻다 대고 반말,"
"사인은 무슨 사인이래. 연예인이라고 그래? 지혜 지에, 하늘 민 쓰지?"
"마, 맞는데. 당신 뭐예요."

그게, 잠시만. 어깨 좀 보여 봐. 막무가내로 지민 어깨를 털어대더니. 이제 됐다! 가도 돼. 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인다. 어젯밤 내가 꿈을 꿨거든? 그런데 너를 딱 만났네. 다행이다. 꿈만 꾸고 못 만났더라면, 죄책감에 며칠을 시달렸을 거야. 지민은 코웃음을 쳤다.

"왜 웃어?"
"요즘은 외국에서도 활동하나 봐요."
"뭐?"
"사이비네."
"나 그런 이상한 거 아니거든! 기껏 어깨에 붙어 있는 거 떼어 줬더니, 어이가 없네. 고맙다고는 못할 망정, 사이비? 지나가다 귀신 침에나 맞아라! 맞아 본 적 없지? 들볶아져 봐야 알지."

오싹했다. 마지막 말에는 정말, 살기가 느껴져서. 사실 지민은 겁이 많다. 그 다음 남자가 공중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고는, 어, 저기! 했을 때는 호들갑을 떨며 남자 뒤로 숨었다. 놀림당한 것을 안 후에는 쪽팔림에 남자를 버려 두고 제 갈 길 가는 척했다. 지민은 갈 데가 없었기에. 지민아!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요! 그게 첫 만남, 양옆 야자수 난 길에서.

그 뒤로 지민을 쫓아다녔다. 이름은 김태형. 홍등가 쓰레기장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갱단 보스한테 주워졌다가, 총 잡는 솜씨가 영 아니라 버려졌대. 말로만 쓰레기장에서 태어난 거지, 사실 한인 어미가 있다. 두 번이나 버려진 셈이다. 내 이름, 내가 지었어. 어떻게요? 신문을 봤는데, 영어 사이에 독보적인 한글로 김태형이라 쓰여 있더라. 그래서 냅다 쓰고 있는 중이야. 진짜 웃긴 사람이네.... 쫓아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다. 하지만 보통 끈질긴 게 아니라, 지민도 포기 상태. 밤이 되면 돌아갈 거라고 했다. 어디로 가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래. 지금까지 묻지도 않은 거 술술 말한 사람이 누구인데. 뭐, 알아서 돌아가면 좋지. 묵을 곳까지 따라온다면 곤란 그 자체일 테니까. 목적지 없는 채로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끝까지 와 버렸다. 땅이 끊겨서, 바다가 출렁이는 곳. 있지, 여기는.... 노을이 이리저리 번진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운을 띄우는 태형에, 어떤 추억을 말하려나 보다 싶었는데. 물귀신이 많아. 아, 좀! 태형은 개구진 웃음을 짓고, 하지만 사실인걸. 지민의 표정을 보고 허리를 접으며 웃는다. 돌아갈까? 헤어지기 전까지 걷기만 했다. 배우가 된 계기, 연예계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등등 지민은 내내 바닥을 보며 말했다. 자신이 바닥까지 내쳐져서 그런지. 태형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긴 공백이 지루해서 하품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잠시 쉼표를 찍고, 태형이 마침표를 찍는다. 내일도 만나, 너 있는 곳으로 갈게. 네? 제가 어디에 있을 줄 알고, 저기, 태형 씨! 태형을 그렇게 허무히 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나도 가야지.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은 게 아쉬웠다. 적어도 도착하고 난 후 처음 눈에 담은 풍경 정도는 찍고 싶었는데, 난데없이 끼어든 태형 덕분에. 그를 불청객이라고 칭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국이 싫어 타지에 왔으면서. 그것도 사람이 싫어서 왔는데, 웃기지. 오랜만에 자 보는 늦잠이라 시간을 봐도 어벙벙하다. 이 시간까지 잤나. 자고 일어난 직후라 그런지, 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서 남는 게 시간인데 더 잘까 했지만 떨쳐내고 나왔다. 다른 게 아니고, 출출해서. 어젯밤 태형과 헤어지고 아무 모텔이나 덜컥 들어왔는데, 잘 선택했다. 멀리 돌지 않아도, 해변가여서 음식점이 많았다. 제일 싼 음식과 제일 비싼 음식을 시켜 먹고 입가를 닦던 중, 누군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안녕, 인사한다. 누구겠어. 용케도 잘 찾아왔네요.

태형과 보는 지평선, 별 박힌 밤하늘, 도로에 차 대신 줄 지어 지나가는 홍게들, 밤이 되면 멀리에서 들리는 오싹한 총성, 같이 먹을 군것질거리를 사고, 태형이 가지고 온 폐차를 끌고 자동차 극장에 가고, 작열하는 태양에 몸이 눋는 듯하면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에이드를 마셨다. 별거 없다. 지민은 별것 아닌 행복감에, 알코올 없이도 취하고는 했다. 아마도 태형에게서 온 것이겠지. 크게 웃지 않아도 기쁘다는 걸, 지민은 나른함에 잠들어 버린 태형을 위해 한쪽 어깨에 중심을 둔다. 지민아, 내일부터.... 잠꼬대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웅얼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 함께했더니, 곧 태형이 돌아갈 시간이라는 것도 캐치하게 되었다. 이 시간대에는 칼같이 가더라. 헤어짐이 아쉽지도 않은지. 속눈썹이 예쁘게 감긴 눈을 더 보다가, 새근새근 잠든 태형을 흔들어 깨운다. 태형 씨, 일어나 봐요. 고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기댄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만다. 팔을 뻗어 지민을 꼭 끌어안는가 하면, 아예 자세를 바꿔 지민의 다리를 베고 눕는다. 딱 3분 후에 깨워 줘. 곧 있으면 열두 시인데요? 그 소리에 태형이 화들짝, 벌떡 일어나 침을 흘리고 잤는지 하얀 입가를 채 정리하지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지민아, 나 갈게!

태형에게 가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밖으로 나온 지 두 시간이 됐음에도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고, 다른 나라도 여행해 보고자. 태형이 가지 말라고 잡는다면 남아 있을 속셈이다. 정박 여부를 결정해 줄 당사자가 나타나지를 않는다. 지민은 속이 탄다. 열대야가 찾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결정해야 해서? 아니다. 보고 싶은 것 같다. 같은 게 아닌, 보고 싶다. 김태형이 보고 싶다. 여행해 줄 김태형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약속 장소를 정해 둔 듯 인연같이 만나야 하는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혹시 이번에는 지민더러 찾으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슬리퍼에 맨발이 까지도록 돌아다녔지만, 대가는 없었다. 허탈하다. 3일을 더 머물렀다. 여전히 혼자다. 짐을 싸는 도중, 남는 게 없다는 걸 알아챘다. 지민 곁에 남아야 할 태형마저.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귀신은 태형이 아니었을까, 하는. 카메라를 목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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