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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태형아, 헤어지자. 그래서 부른 거야. 약지를 매만지다가, 딱 들어맞던 반지를 잡아 뺀다. 꽉 쥔 주먹을 가지고 가서 손바닥에 칠이 벗겨지고 만 반지를 쥐어 준다. 이거는, 다른 사람이랑 해. 알겠지? 여느 때처럼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이고 자리를 뜬다. 만남이 없는 이별이다. 반지를 쥔 채로, 공허와 미련이 남아 눈으로 지민을 쫓는다. 옅게 선팅 되어 있는 차창으로 낯선 여자가 보인다. 닳고 닳은 것은 지민과 맞춘 반지가 아니고, 태형이었으리라. 밟고 서 있는 땅이, 푹푹 빠진다. 몸이 무거워서, 아니, 모든 무게를 마음에 쏟고 있느라. 한 방울, 두 방울 회색 아스팔트 바닥이 짙어진다. 눈물인 줄 알았건만, 정수리로 떨어진 기분 나쁜 빗방울. 지민과 이별만큼이나 두서없는 비다. 예고도, 규칙도 없이 떨어진다. 차라리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가 아닌, 흐린 하늘에 정류한 먹구름이 묵직하게 몸을 뭉개는 게 낫겠다.
잔뜩 고인 물에, 누군가 머리꼭지를 잡고 담갔다 뺐다 반복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행색.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굳게 닫힌 문이 활짝 열린다. 비 맞고 온 거예요? 전화도 안 받더니, 이게 무슨.... 묵묵부답인 태형을 졸졸 따라붙는 정국. 씻는 데까지 따라오겠다, 너. 축축하게 달라붙는 옷을 벗으며 하는 말에 뒷목을 긁적인다.

“박지민... 은요. 박지민 때문에 나간 거잖아요.”

“나는 형이고, 걔는 박지민이냐.”

아, 어쨌든.... 욕실 문을 막다시피 서 있는 정국을 지나쳐 들어간다. 남남인 듯 가족인 둘. 서류상으로는 남이지만, 돌아가신 정국의 어머니께서 명명한 이복형제다. 수순까지 밟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태형에게 얽힌 감정이, 선을 넘지 말라고 이성을 깨치는 바람에 별수 없이 아버지의 통지를 따르고 있다. 바깥에서 헤어진다고 해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같아서 애인인 지민이 얼마만큼 괴롭게 하고, 옥죄는지 지켜봐 왔다. 아주 가까이서. 감정대로 행할 수 없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보다 흐트러짐 없던 감정을 밤마다 곱씹었다. 정면으로 천장을 보며. 금방이라도 위아래가 뒤집힐 것 같은 느낌, 아니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복형인 태형을 수중에 띄우면 굳은 경계가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지고는 한다. 음울로 물드는 날이 대다수였고, 태형이 흘린 바다를 줍기도 했다. 심장 겉껍질에 무성하게 새겨진 이름, 다시토록 지울 수 없고. 꽤 늦은 시간에 귀가한 날,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태형이 아닌 지민이었다. 현관에서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지민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태형이 동생? 안녕, 가끔 너한테 질투해. 허? 홱 몸을 틀어 나가 버리는 지민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한 집안에, 뒤꿈치로 성질머리 급하게 신발을 벗고 무작정 태형의 방문을 열었다. 잘 정리되어 있는 빈 침대. 닫고 나갔던 자신의 방문이 티 나게 열려 있는 걸 보고 설마 했다. 방 전체를 가득 메운 정액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창문까지 활짝 열고서야 곤히 잠든 태형이 눈에 들어왔다. 하, 진짜. 왜 남의 방에서 떡을 치고 지랄이야.... 깨워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형, 태형이 형. 깊은 잠에 빠진 건지 수차례 불렀지만 미동도 없다. 어깨를 잡고 흔드는데, 돌돌 말린 이불에 미처 보지 못한 맨몸이 시야에 들어찼다. 얼굴은 시뻘개질 대로 시뻘개져서 태형을 흔들어 깨운다. 형, 좀 일어나 봐요.... 으으응 대답인지 앓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다, 기어이 정국의 목을 끌어안는다. 아무래도 잠결에 아까까지 있던 지민으로 착각한 것 같은데. 그대로 쩡 굳고 말았다. 태형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야, 미안하다. 당분간 내 방에서 자. 집 들어오자마자 박지민이, 속수무책으로.... 무어라 더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문다. 어쨌든, 깔끔하게 해 놓을 테니까. 정국은 태형이 말하는 내내 생각했다. 옷이나 입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이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박지민이 계획했던 일이 아닐까 해서. 그리고 다음 날은 태형이 열병에 시달렸다. 안 그래도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몸을 격하게 쓰다 보니 버티지 못한 것 같다. 지민을 사무치게, 완벽하게 증오하게 된 기점이다.

태형은 며칠을 자기만 했다. 나갔다 들어와도 자세 한번 바꾸지 않고 정신없이 자는 태형의 코밑에 검지를 대 보기도 했다. 비 맞고 돌아온 날부터 이러는 게, 낌새가 좋지 않았다. 밥도 안 먹었을 거고,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라 태형을 깨우려고 했지만 ‘내가 일어나기 전까지 깨우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던 얼굴, 어투가 떠올라서 쉽사리 깨울 수 없었다. 하여튼 전정국, 김태형 말은 죽어도 잘 들어가지고. 어제나 엊그제나 고민하던 것처럼 문 앞에서 서성이다 깨우고 말리라는 결심으로 발을 뗄 때는 언제고 우뚝 멈춰 섰다. 심연과도 같은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든다. 내 이름도 아니면서. 지민아, 내가 잘할게.... 한참을 더 끙끙거리다가 그친 잠꼬대. 이 잠꼬대는 정국이 집에 없을 때도, 티브이를 볼 때도, 밀린 과제를 해치울 때도 했을 것이다. 바람 불지 않는 방인데, 왜 자꾸만 흔들리는지. 시드는 건 풀과 나무뿐만이 아니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곳곳이 시들어간다. 볼을 타고 흐르는 시듦, 방바닥에 채 떨어지지도 못한 채 말라 버린다. 흐느낌도 없이, 왜 이제까지 태형이 바다를 흘렸는지 알 것만 같다.
칼과
날, 할퀴는 바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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