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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도 벚꽃이 없는 곳에는 어쩐 일이에요, 형. 그대로라니까요. 휠체어를 거뜬히 밀 수 있을 만큼 자란 것 말고는, 모두 그대로예요. 잿빛 하늘, 감흥 없는 도시. 화르르 녹는 태양, 태양마저 재색으로 보이는 환영, 이따금 색 빠진 풀밭에 구르는 나를 보기도 한다. 잔디를 한 움큼씩 뽑아, 엉망으로 만들며 누울 무덤을 애달게 찾는다. 머리칼에 붙어 나근나근 흔들리는 회색 잔디. 과연 색을 볼 수 없는 것일까, 파란 구름과 하얀 하늘처럼. 어리석게 색을 되찾는 짓은 하지 않는다. 회색보다 더 회색 같은, 우뚝 선 병원.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진 휠체어를 탄 사람, 아니, 형. 형의 환자복 위로 휘갈겨 쓴 내 이름. 감기인가 보다. 병원 앞 큰 나무 아래,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는다. 발끝에 피..
전정국에게 나는, 끽해 봐야 죽은 애인을 대신한 닮은 사람. 발버둥치고, 죽기 살기로 다리에 매달려도 딱 거기까지다. 추적추적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흙탕물에 구르며 비참해질수록 순정은 빛을 냈다. 김태형의 순정은, 빛내다 못해 발화한다. 호모 포비아였으므로, 철저하게 숨겼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둥, 알아챌 수 없도록 가장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목젖이 타는 것 같아서. 어, 자격지심에. 그럴 때마다 전정국은 응원해 줬고, 투정은 덤이었다. 왜 형만 연애해요, 나랑 이어 줄 사람은 없어요? 너무하네. 너를 사랑하려면 너무해져야 했다. 내가 더럽게 치사하고, 너무해 봤자 너는 못 따라가. 얼마 안 돼서 여자 친구 생겼잖아. 너는 이미 승리자였는데, 기어코 뭉툭한 발꿈치로 작아진 나를 짓뭉..
장전할 줄도 모르는 권총을 가지고 다닌다. 그 자체로 드는 위화감 때문에, 어린애들 호루라기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편이 훨씬 나았을걸. 그래도 김태형이 유일하게 총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 총 돌리기. 내 손 위에서 자유자재로 굴려지는 총을 보고 눈을 빛낸 게 시초였다. 무게가 꽤 나가는 총으로 온종일 손장난을 치더니, 뽀르르 나에게 와서 이것 좀 봐 달라고 떼를 썼다. 나왔다, 집중하는 입술. 다음부터는 무리가 가지 않도록 22구경의 권총을 테이블에 뒀다. 슬쩍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작고 가늘은 손목이었기에. 정국아, 이거 네가 둔 거지? 조용히 넘어갈 줄을 모른다, 김태형. 거리는 이미 쓰레기들로 넘쳐나 숨이 막혔다. 트이지 않는 시야와 썩은내로. 상대적으로 이목구비가 붙어 있는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