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 쫓기는 줄 알았다. 용케 안 잡혔더라, 뒤에서 보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너는 모르지? 역시나 몸만 덜렁 와서는 말만 많다. 이야, 그나저나 색 존나 잘 빠졌네.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디? 벅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같이 안 살아요. 아.... 짧은 탄식이 귀에 꽂혀 픽 웃었다. 뭘 웃어, 미안하라고 그런 거냐? 아니요, 어제 형도 할아버지 이야기해 줬으니까요. 답지 않게 화기애애해질 때쯤 늘 윤기를 겨냥하던 회초리 끝이 정국을 가리켰다. 까딱. 야, 잘 갔다 와라. 다리 꼬는 버릇은 어디 안 가고, 태평하게 자리에 앉아 정국에게 손을 흔든다. 조회 시간은 끝났지만, 교실에 남아 복작복작 떠들던 아이들이 교탁 앞에 선 정국을 힐끔 쳐다보았다. 예상보다 담임의 호통은 들을 만했다. 잔소리를 ..
아, 어.... 쩡 굳은 태형의 반응은 곧 정국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푸석거림이 남은 뒤통수를 멀뚱히 쓸었다. 민 지 얼마 안 되어서 손바닥이 까끌했다. 완벽한 갈빛이다. 너, 언놈이... 머리를 그따위로 만들었어. 소중한 흑발! 어디 갔냐고! 파워 쿨톤에 찰떡이던 흑발이! 어디로 갔냐고! 분개하는 태형을 욕실로 겨우 밀어 넣었고, 신발장에 거울을 올려 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미신에 다이소에서 단돈 1,000원을 지불하고 샀던 조그마한 거울로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아직도 그런 미신을 믿어요? 타박할 때는 언제고, 가장 요긴하게 쓰고 있는 건 정국이다. 본인마저 어색함에 몸서리를 치고 만다. 쩡구아, 금방 끝나. 야, 멍청아, 너 부른다고 뒤를 보면 어떻게 해. 하얀 이발소 가운을 몸 앞에 두르고 경..
아가미가 없는 대신, 뚫린 등에 깊은 또 하나의 심해로 큰 한숨을 뱉는 고래. 사람도 크고 많은 한숨을 쉬면서 심장에 조금씩, 조금씩 망연한 블랙홀이 나고 말았겠지. 통증, 괴롬을 모두 탄내 나는 블랙홀에 내던질 수 있다면, 사랑의 그리움까지도. 모닝콜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면 아침이 밝았다는 걸 체감한다. 손길이 닿을 때까지 우는 것을 무심하게 꺼 두고, 눈을 감으면서 귀마저 닫았는지, 미동도 없는 태형을 바라보다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새벽 같은 아침은 몹시 서늘해서, 어제도 했던 같은 고민을 한다. 하복을 입어야 하나, 춘추복을 입어야 하나. 인스턴트로 차린 식사를 해치우고, 더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멍한 몸으로 양치를 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물로 빗고도..
분식집, 망한 옷가게, 생선가게, 반찬가게 등등. 분식집 앞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고, 그 위로 몇 걸음 움직이면 태권도장이 있다. 태형은 운동이 끝나면 땀에 푹 절어서 피아노 학원 입구에 크게 자리한 피아노 구경을 하러 가고는 한다. 면밀히 말하자면, 큰 피아노가 아닌 학원생인 윤기를 보러 가는 거고. 태권도장에 다니건, 피아노 학원에 다니건 또래들이 우르르 몰리는 분식집에서 윤기를 처음 보았다. 하얀색 교복 니트가 유난히 잘 어울려서, 교복 차림에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가 퍽 잘 어울려서 넋을 놓고 떡을 먹다가 눈이 마주쳤다. 잠시였지만 저를 보고 질색하는 얼굴도 잘생겨서, 생면부지인 윤기에게 반했다. 나갈 쯤 거울을 보니 입가에는 양념이 다 번져서는, 더 가관인 건 이에 고춧가루가 꼈더라. 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