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하게 깔리는 신디사이저, 언제나 왜 이렇게 신나 있는지. 얼굴은 딱히 신나 보이지도 않는다. 물기가 축축하게 스며든 도시, 사방으로 뻗친 푸시시한 머리카락. 의미 없는 허밍은 뿌리처럼 내뻗은 심장을 저릿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젖어 있는 교복 바짓단.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무난한 네이비블루가 깊이 젖어 짙은 경계선을 모양낸다. 그 밑으로 딱하게 드러난 허한 발목이 버석한 입으로 내는 허밍의 의미를 찾는다. 끝까지 차올라 흐르는데도 이토록 건조한 어항. 진한 네이비블루만이 물살에 거꾸로 물장구친다. 낡고 헐어 다 헤진 누런 벽, 엉겁결에 붙어 있는 듯한 걸이에 건조한 접이우산. 건조함은 이대로도 모자란가 보다. 가야지, 태형아. 우리 집은 여기인데, 내가 어디를 가? 계속..
어디에서든 웅크려 앉는 게 습관이 되었다. 웅크리고 있으면 거꾸로 세상을 품을 수 있다. 머리 위로 태양이 녹아 흐르고, 새벽은 늘 파르랗고, 눈을 뜨고 있는, 전파가 잡히지 않는 흑백 텔레비전. 의지에 상관없이 피를 토한다. 입가는 한낱 네발짐승처럼 선혈 범벅으로, 그것을 말끔히 닦을 수도 없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곳곳에 웅덩이진 핏물, 연달아 오는 공명은 나를 무능하게 만든다. 눈앞에서 녹색 공기 방울들, 연달아 덮치는 과호흡까지. 폐쇄하고 있는 철제문 너머에서 쿵쿵. 마지막으로 떠다니는 보랏빛 빗금을 만났다. 붙들어 잡고 있는 정신을 놓아, 3, 2, 1.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철제문 개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무색무취 알약 더미. 잠시 심장을 멈춘다. 여린 목구멍의 피맛을 맡는다. 희멀건 침대 ..
널 닮은 봄이 왔어. 봄에는 뭐부터 할 예정이야? 정신없이, 목을 조여대는 통에 크게 숨도 못 쉬고 바쁘게 살았잖아. 나는 최근에 그림에서 건축으로 전과도 했고. 그래도 그림은 쉼 없이 그리고 있어. 요즈음 서양화의 비중이 커, 네가 좋아하는 서양화. 제일 어려워하던 빛의 표현을 더 자연스럽게 그리는 연습도 하고 있어. 빛을 그림에 담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더라. 손에 익을 때까지 시간은 조금 걸릴 거야. 그러고 보니 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듯한 완성작은 사진으로 남겨 두려고. 꼭. 여전히 나의 취미로 굳어 있는 유화, 몇 작은 처분했어. 받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나마 고생을 덜 수 있었어. 너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그림은, 아직 방 한 켠..
우리의 온도차는 가끔 나를 당황시킬 때가 있다. 김태형은 핫초코를 마신다. 나는 겨울에도 냉수를 마신다. 단내를 폴폴 풍기는 핫초코, 퍽 잘 어울리지. 나는 물을 끓이던 중, 무른 수증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골똘히 생각해 본다. 김태형을 녹이면 여름이 나왔다. 그렇게나 뜨거운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차가운 사람이 아닌데도 김태형의 독보적 뜨거움에, 제풀로 차갑게 식었다. 그래야만 적절한 온도로 김태형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세 번째 눈으로 보아야 최고의 궁합이라는 게, 나는 그게 조금 아쉽다. 사랑에서의 을이었다. 언제나 뒤에 서서 그림자를 밟았다. 같은 위치에 서는 법은 없다. 나는 을이고, 김태형은 윤채가 돌았다. 사실은 기가 죽은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재가 되는 것..
도망쳤다. 씨발. 좁은 모텔, 좁은 침대에서 몸을 구겨 잤다. 섹스 말고, 수면. 옆방에서 격한 소리가, 새벽 내내 들렸지. 누가 비 오고 나면 맑아진대, 머리통 한 대씩 갈겨 주려니까. 떡 치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쌍! 김태형은 내 원수다. 원수랑 같은 침대 위,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저절로 떠진 눈. 피곤했다. 원수는, 입에 내 엄지손가락을 물고서 자고 있었다. 어쩐지 축축하더라. 이렇게 좆같을 수도 없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관이잖아. 손가락을 살며시 빼고, 서랍에 구비되어 있는 새삥 딜도를 입에 물려 주었다. 이 상황에서 발 뻗고 잘도 처잔다. 신기할 따름. 일어나, 김태형. 씻고 나가게. 싸구려 샴푸와 바디워시 냄새. 둘의 몸에서 똑같은 냄새가 진..
도서실 책장 사이에서 키스를 하고는 했다. 원체 책은 관심도 없고, 흥미도 느끼지 못하지만, 동그란 안경에 페이지를 넘기는 곱다란 김태형에게는 흥미 120%. 열없는 김태형, 내 말 너무 잘 듣지. 태형아, 나는 네가 아주 망가졌으면 좋겠어. 통금 시간 여섯 시, 무르익은 분위기를 깨는 좆같은 통금. 겉옷을 챙기며 칼같이 나간다. 열 시에는 보내 줄게, 나랑 있자. 잔뜩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싫다는 말은 안 한다.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아니면 밤새울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김태형은 좀 전에 꿰입은 옷을 벗었다. 교복도. 지금까지 아껴서 먹으려 했는데, 좁디좁은 골반이 예뻐서 안 되겠더라. 들어찬 것을 어디까지 삼킬 심산인지, 아다 주제에 욕심은 많아 몸뚱아리가 흔들릴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분리 불안과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 마냥 내 사랑을 갈구하는 김태형. 애정에 목말라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옭아맸다.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나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어린애 같은 김태형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태형아,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너를 좀스럽게 갉아먹는 건 누구야? 김태형은 어딘가 불안했다. 불안한 만큼 살을 비벼 왔다. 섹스로 사랑을 확인했다. 그에게도 단출하고 소소한 취미 생활이 있는데, 예쁜 속옷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 취미가 생긴 이유도 바로 나다. 충분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김태형은 스스로 납작한 가슴 위로 브래지어를 채우기도 한다. 채워 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풀어 주는 걸 더 좋아하는, 앙큼한 김태형. 잦은 외출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겨진 빈집에서 칼로 ..
우리, 징하게도 붙어 다녔지. 지금처럼 홀로 남겨진 시간에도, 네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여전히 코끝에 남아서, 나를 파고들어. 지배당하는 것 같아, 태형아.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후 완전한 외톨이가 되었다. 깨지는 접시를 보면서 내 인생이 깨지는 것 같다, 우스갯소리를 열 올리며 싸우시는 두 분 몰래 중얼댔었는데.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사회적 인식이 너무나도 후졌기 때문에, 나는 부모 잃은 새끼라고 꼬리표 달리는 게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나 같은 애 하나가 더 있었는데, 애들이 대놓고 손가락질하고 그랬거든. 그래서 이모에게 전학을 부탁했다. 짐짝이 요구하는 것도 많네라는 얼굴로 못 이겨 알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났다, 김태형. 미안하게도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솔직하게 ..
[ㅉㅣ미나 희연이 알지?? 걔ㅐ랑 친한 거 안다 나 걔 생일 좀 알려 도] 안 그래도 월요일 아침은 뭣 같아. 일조하지 마, 김태형.... 지민아, 봐 봐. 네가 입을 거라고 생각해 봐. 이런 걸 내가 왜 입냐?! 아, 어쨌든! 이게 A, 그리고 이게 B. 자, 어떤 게 더 나아?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 지민아, 향수.... 지민아, 봄에 신을 신발.... 지민아, 지민아, 지민아. 네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 듣기 좋은 건지 모르겠다. 너라서 더 화가 나. —저기, 태형아. 그, 박지민... 소개 좀. 착한 것 같던데, 다가가기는 뭔가, 힘들게 생겨서. —야, 그거를 왜 나한테 부탁하는데? 징검다리인 줄 알아, 내가. 걔, 그냥 바보야. 바보, 아니, 바보는 나인 것 같다. 박지민은, 아무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