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가 있어서, 귀신을 본다고 했는데. 지민은 괜스레 기분이 찝찝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으면 건드리기도 뭐해서.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지민은 옆에 두었던 카메라를 챙긴다. 태형 씨, 버스 왔어요. 태형의 공황을 깬다. 아역 배우로 입지를 넓히고, 국민 남동생에서 국민 연하남으로 등극.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뛰어난 표정 연기, 경력 30년쯤 되는 몰입력. 연기 자체로만 톱스타 타이틀까지 따낸 남자. 물론 얼굴을 빼놓을 수가 없지만. 거품? 인성 논란? 그런 건 모르겠고, 그저 탄탄대로였는데. 지민과 동갑인 신예가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한다. 혜성처럼... 그래, 혜성처럼. 바닥부터 올라오지 않고,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번쩍 등장했으니, 혜성이라는 기명이 퍽이..
아래는 물, 위에도 물. 몸을 마구잡이로 덮치는 물들에 어느 구멍으로 밀려 들어가는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쾌청했던 하늘을 가르는 번개와 천둥이 쾅. 물 밑으로 푹 잠겼다가 눈앞이 번쩍거리고, 한참이나 부족한 공기를 한시바삐 들이킨다. 누군가 아래서 발목을 잡고 있는 듯했고, 아니면 가라앉도록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도 같다. 허파에 생긴 작은 바다가 출렁인다. 몰아치는 파랑, 팔이고 다리고 온몸을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이 감당할까. 흡, 흐악, 헉, 살려, 푸학, 주세요! 살려, 주, 아흑…. 발 닿을 데 없이 깊고, 아득한. 머리 위로 한차례 바다가 퍼붓는 파도. 그리고 푹신한... 이불. 꿈, 꿈이다. 범상치 않은 악몽으로 인해 땀으로 흠뻑 젖고만 머리를 쓸어넘긴다. 이마까지 ..
1. 거센 비바람이 맹렬히도 창문을 때린다. 창틀이 아슬하게 버티며 바람 부딪히는 소리가 괴이하기까지 한 폭풍이 몰아치는 밤. 백 개의 손가락이 한 번에 창을 두드리는 바람에 선잠이 몽땅 달아나 버렸다. 잠에서 깬 김에 바깥에 묶어 놓은 개들을 보러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태형은 문고리에 구기다시피 걸어 놓은 노란 우비를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뒤에 달린 모자까지 야무지게 머리에 쓰고, 곧 몸으로 부딪힐 밤 폭풍에 침을 꼴깍 삼킨다. 어젯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인해 요긴하게 쓰다 신발장에 세워 둔 손전등까지 잊지 않고. 장마철이라고 떠들기에 한껏 기대했건만, 가뭄은 극심해져만 가더니 하늘에서 묵혀 둔 폭우를 한 번에 뿌릴 줄이야. 빗발이 하도 세차서 일부러 작게 연 문인데도 그 틈으로 비가 다 쏟아..
잃어버린 청춘, 잃은 청춘의 색을 찾았다. 1. 지도에는 명시되어 있을까 싶은 촌구석. 지민은 그런 촌구석에서 태어났다. 별다른 불만 없이 자랐고, 남들보다 조금, 조금 더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듣기만 했던 서울을 궁금해했다. 부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머리 좋은 지민이 서울로 출세하기를 바라셨고, 착한 아들의 목표는 서울 상경이었다. 처음 뚜렷한 목표를 가지게 된 때가 중학교 1학년 끝자락. 처음 태형을 만나게 된 때도. 2. 이런 촌구석에 누가 이사를 오나, 반에 전학생이 온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답지 않게 학교가 떠들썩했다. 지민은 가만히 책상에 턱을 굈다.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드르륵 열린 앞문으로 담임 선생님과 그 뒤로 전학생이 따라 들어왔다. 우물쭈물거리는 게, 살가운 성격은 아닌가 보다. ..
회고에는 몽롱한 여명에 우거진 안개. 지중 깊게도 박힌 뿌리들의 붐비는 난교, 그림자에 스며들어 부재만 달랑 남긴 의식아. 광염은 한밤중 은하를 뜨거운 색으로 녹녹히 흘러서 천체 무리를 모서리부터 달궈 발열을 이기지 못해 화마를 따라 절반을 잃고 뚝뚝 흐르는가 하면 10의 43승 초의 눈금을 만들어 빼곡히 검은 입이 박힌다. 탄생, 탄생, 탄생. 참혹한 폭발 흔적, 잘게 부스러진 별 시체가 드넓게 포개져 칠석 작교와 같은 다리를 이루고, 또 다른 우주로 가는 다리. 지구를 감싸러 가는 달이다. 지구와 이름 모를 새에게 공전 궤도를 맞춘 서슬 퍼런 달. 머무르는 새가 흘린 눈물로 큰물이 들어차기도 하고, 표면을 깨고 슬금 자란 빙하는 평평한 암흑 천장을 뚫을 듯 솟구치기도 한다. 야윈 채로 얼어 버린..
시계가 멈췄다고 시간도 멈췄을까, 뒤로도 갈까. 시계를 고치지 않는다. 뒤얽힌 시간 속에 머물 수 있게, 갇힐 수 있게. 멈춘 오전, 니은에 걸터앉아 창을 옆으로 밀어 연다. 먼지 구덩이와도 같은 창틀, 벌레들은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져 푸슬한 먼지 이불을 덮은 채 어떤 봄눈이 세차게 휘날리는지도 모른다. 둥글고도 모난 눈무덤 위 몸을 뉘인다. 얼굴, 가슴, 배, 다리. 죽죽 날리는 눈발에 무덤 주인은 내가 된다. 봄눈은 시간이라, 그렇게 두두룩 폐에 쌓여 호흡하는 코 입으로 우리를 내쉰다. 틈 없이 손가락을 딱 붙이지만, 회고는 한 줌 잡히는 법 없다. 노엽게도 작은 비명은커녕, 허연 공백만을 남긴다. 아래로 깊은 공백, 살점을 이로 물어뜯고 푹 파인 살 밑을 엄지로 꾹 누른다. 하얗게 질릴 때까..
1987, 조용하다. 마룻바닥이 삐걱이지도 않는다. 마음이 파래지게 부는 산들바람은 먼저 연갈색 머리카락을 훑고, 다음으로 스치고 지난 풍경. 짤랑, 귀를 간질이는 찬란한 소음. 작은 금속 붕어가 뒷들 초록 바다에 아가미를 벌컥 열고 숨쉰다. 초록 바다의 격류에도 몸 사리지 않는다. 꼬르륵, 머리에 창해를 이고 수면 위로 기꺼이 띄운 여름 잎. 억겁을 버틴 여름 잎은 가까스로 5월의 블루스를 춘다. 다다미가 깔린 방, 소박하게 마련된 부쯔마 앞에 발을 모으고 합장한다. 열린 창문 틈으로 길게 햇살을 울린다. むすんでひらいて…. 희미하게 들리는, 흐린 곳 없이 명랑한 목소리가 속눈썹을 굳힌다. 열 손가락을 딱 붙이고서 풍경 소리를 듣거나, 두부를 싣고 어정어정 달리는 트럭 소리를 들으면 샘에 고인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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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가능세계可能世界의 중문을 넘어, 만 개의 빳빳한 잎이 달린 단단한 나무 기둥을 타고, 산산이 찢어진 천공으로 들어가. 쭉쭉 째진 극공으로, 뭉그러뜨릴 수 있는 떼구름이 터트리는 부스러진 진물 난 섬광에 화상을 입는다. 나는 가끔 빛을 만져. 동글게 물집이 잡히거나, 고기처럼 피부가 군침 도는 연갈색으로 익거나. 발광체인 별이 되지 못해서 그렇다. 플라스틱 콘솔을 쥐고, 트는 방향으로 조종이 된다면 좋을 텐데.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골수의 게슈탈트를 범하고 싶은 게 더 크다만. 뒤꽁무니만 쫓는 주제에, 바라는 게 많아서. 한참 뻗어도 닿을 수 없다면 몽상으로 족할 것이다. 잔뜩 구겨져 물결 주의보가 울리는 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짧다란 필라멘트를 꽂을 것이다. 깜빡, 깜빡. 그러면 굳어진..
허다히 들어오는 해가 내쏘는 일광에 직면하는 자리, 교실 창가에 작은 화분 두 개. 크기가 얼마나 조그마하느냐면, 손바닥 위 균형을 유지한 채 우뚝 세울 수 있다. 정성을 쏟지만 별개로 작은 것에 대해 주저가 많다. 작은 것 앞에 더 작아지고, 나약해진다. 작은 화분에 비교하면 거대한 손이 속뜻과 달리 나가 해칠까 봐, 망가뜨릴까 봐. 화분, 조그마한 강아지, 그리고 자잘한 감정. 번번이 주관적인 무기가 될 걱정스러운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다니는 게 버릇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따갑고 날카로운 언사로 염통을 쿡쿡 쑤시는 것처럼, 길쭉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눈알이든 푹 찌르는 망상을 하고는 한다. 차라리 짝사랑 같은, 담고 있기도 머리에 이고 있기도 수월찮은 감각을 품고 있는 게 나으리오. 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