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청춘, 잃은 청춘의 색을 찾았다. 1. 지도에는 명시되어 있을까 싶은 촌구석. 지민은 그런 촌구석에서 태어났다. 별다른 불만 없이 자랐고, 남들보다 조금, 조금 더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듣기만 했던 서울을 궁금해했다. 부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머리 좋은 지민이 서울로 출세하기를 바라셨고, 착한 아들의 목표는 서울 상경이었다. 처음 뚜렷한 목표를 가지게 된 때가 중학교 1학년 끝자락. 처음 태형을 만나게 된 때도. 2. 이런 촌구석에 누가 이사를 오나, 반에 전학생이 온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답지 않게 학교가 떠들썩했다. 지민은 가만히 책상에 턱을 굈다.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드르륵 열린 앞문으로 담임 선생님과 그 뒤로 전학생이 따라 들어왔다. 우물쭈물거리는 게, 살가운 성격은 아닌가 보다. ..
쉬는 숨에서조차 난류가 흐른다. 무엇에 쫓기는가, 칠흑빛 덧진 피멍을 넓은 혓바닥으로 핥는 피맺힌 새벽녘? 쉽게 잠들지 못하고, 휘영 그믐밤 따라가지 못하고. 저 끝 별무리에서부터 달려오는, 날카로이 발톱 세운 새벽이 송두리 삼키는 대로, 삼켜지고, 산산이 뜯기고, 정처 없이 살아 있는 밤. 살아 살육하는 밤. 다리 달린 짐승도 아닌 게, 거구를 쩌억 벌려 몸통을 집어삼킨다. 쿵, 엉덩방아를 찧고 둘러보면 끈끈한 밤의 뱃속. 도망갈 데가 없어 까무룩 정신 잃으면 또 재생되는 환영. 검은 물, 검은 강. 우묵히 옅게 괸 물가에는 검은 해바라기가 갈기 펼치고 우뚝 서 있다. 새카맣게 물결 이루는 강물, 머리 끝까지 담그면 같이 검어질 수 있을까. 스며들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물. 물로 녹는다거나, 자꾸만..
가라앉는 저녁, 가라앉는 노을, 불그스름히 다음 요일로 넘어가며 띄운, 헤진 밧줄이 위험 안고 희생하는 공중 그네에 발을 달랑거린다. 발 아래 밀물지는 파도는 거친 모래 한 알씩 아슴아슴 스며들어 마를 새도 없이 철퍼덕 몸을 던진다. 파도 소리가 서린 모래는 우두커니 적셔져 수몰한다. 물기 없이 메마른 달을 적실 파도를 통째로 끌어 던지고서, 닻을 내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고정시켜 수면 위를 오래도록 은빛으로 비춰지게 해야지. 잘 달여진 물을 퍼담아 금붕어를 푼다. 달을 짙게도 달인 물인 것도 모르고, 눈을 깜빡이지 않는 금붕어. 깜빡이지 않고, 감을 일이 없어 누구를 떠올리지도 않을 테지. 눈꺼풀에 사는 누구를, 와장창 깨트릴 일도 없을 것이며. 깨진 날카로운 것들이 흉중을 후벼파기도, 흔적을 남..
이마 위에 올린 얼음 수건, 붉게 춤추는 심장에도 올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녹슨 피 흘리며 너덜거리는 살점은 흘러간 어느 것에 베였는가, 욕심도 많아 통째로 앗아가는 급한 밤 폭풍을 뒤따라 채찍질하는 것은 누구이며, 폭풍 몰아치는 밤하늘 하얀빛으로 땜질한 별 경계 잃고 와르르 쏟아질까 아래서 어깨로 괴 희생하는 것은 누구인지. 금 부스러기 별 한 조각 야금야금 갉아 먹힌 기억과 엉켜 들날린다. 비행처럼 보이지만 추락하는 것. 신발 가지런히 벗어 폭풍 안으로 낮게, 낮게 자세를 숙이고 몸 맡긴다. 신발을 벗고, 발목을 벗고, 잘린 단면으로 바람 타고 걷는다. 온갖 천체 휩쓴 오뉴월 폭풍이 만든 회오리에는 서쪽 성긴 저녁노을 화르륵 달 겨우 밀어내며 버티고, 바닥에 오롯이 귀 대고 밤길, 물길 소리 ..
회고에는 몽롱한 여명에 우거진 안개. 지중 깊게도 박힌 뿌리들의 붐비는 난교, 그림자에 스며들어 부재만 달랑 남긴 의식아. 광염은 한밤중 은하를 뜨거운 색으로 녹녹히 흘러서 천체 무리를 모서리부터 달궈 발열을 이기지 못해 화마를 따라 절반을 잃고 뚝뚝 흐르는가 하면 10의 43승 초의 눈금을 만들어 빼곡히 검은 입이 박힌다. 탄생, 탄생, 탄생. 참혹한 폭발 흔적, 잘게 부스러진 별 시체가 드넓게 포개져 칠석 작교와 같은 다리를 이루고, 또 다른 우주로 가는 다리. 지구를 감싸러 가는 달이다. 지구와 이름 모를 새에게 공전 궤도를 맞춘 서슬 퍼런 달. 머무르는 새가 흘린 눈물로 큰물이 들어차기도 하고, 표면을 깨고 슬금 자란 빙하는 평평한 암흑 천장을 뚫을 듯 솟구치기도 한다. 야윈 채로 얼어 버린..
@b1uesummer
깡말라 각진 어깻죽지에 하나, 맨들한 미끄럼틀을 방해 없이 쭉 타고 내려와서 안쪽으로 굽는 살에 하나. 다리 긴 거미가 팽팽히 줄을 치고 산다. 큼지막한 타란튤라 두 마리. 비쭉비쭉 솟은 털의 디테일 때문일까, 잉크 그림일 뿐인데도 닿으면 안 될 것같이 생긴. 뒤척이다 꾸는 꿈에는 매번, 거미가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서는 긴 다리를 이마에 딛고, 뻥 뚫린 입에 거미줄을 친다. 입가에서 입가로, 중앙에서 지그재그 줄을 치며 마무리짓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가락을 벌릴 수 없게 칭칭 감아 버린다. 땀벼락을 맞은 채 깨어나 보면 벽에 걸린 알록달록한 칼 뒤로 새끼 거미가 지나가는 환영을 본다. 꿈을 꾸는 것뿐만 아니라, 모양새만 갖추고 있는 화장실 하수구에서 초록색 등을 가진 새끼 거미 떼가 역류해 ..
시계가 멈췄다고 시간도 멈췄을까, 뒤로도 갈까. 시계를 고치지 않는다. 뒤얽힌 시간 속에 머물 수 있게, 갇힐 수 있게. 멈춘 오전, 니은에 걸터앉아 창을 옆으로 밀어 연다. 먼지 구덩이와도 같은 창틀, 벌레들은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져 푸슬한 먼지 이불을 덮은 채 어떤 봄눈이 세차게 휘날리는지도 모른다. 둥글고도 모난 눈무덤 위 몸을 뉘인다. 얼굴, 가슴, 배, 다리. 죽죽 날리는 눈발에 무덤 주인은 내가 된다. 봄눈은 시간이라, 그렇게 두두룩 폐에 쌓여 호흡하는 코 입으로 우리를 내쉰다. 틈 없이 손가락을 딱 붙이지만, 회고는 한 줌 잡히는 법 없다. 노엽게도 작은 비명은커녕, 허연 공백만을 남긴다. 아래로 깊은 공백, 살점을 이로 물어뜯고 푹 파인 살 밑을 엄지로 꾹 누른다. 하얗게 질릴 때까..
1987, 조용하다. 마룻바닥이 삐걱이지도 않는다. 마음이 파래지게 부는 산들바람은 먼저 연갈색 머리카락을 훑고, 다음으로 스치고 지난 풍경. 짤랑, 귀를 간질이는 찬란한 소음. 작은 금속 붕어가 뒷들 초록 바다에 아가미를 벌컥 열고 숨쉰다. 초록 바다의 격류에도 몸 사리지 않는다. 꼬르륵, 머리에 창해를 이고 수면 위로 기꺼이 띄운 여름 잎. 억겁을 버틴 여름 잎은 가까스로 5월의 블루스를 춘다. 다다미가 깔린 방, 소박하게 마련된 부쯔마 앞에 발을 모으고 합장한다. 열린 창문 틈으로 길게 햇살을 울린다. むすんでひらいて…. 희미하게 들리는, 흐린 곳 없이 명랑한 목소리가 속눈썹을 굳힌다. 열 손가락을 딱 붙이고서 풍경 소리를 듣거나, 두부를 싣고 어정어정 달리는 트럭 소리를 들으면 샘에 고인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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