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지 말아, 운명을 찾아낸 우리니까. 어느 나라 한 곳 빠트리지 않고 전역을 강타한 정체 모를 1022년형 전염병. 살아남은,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전염병을 ‘얼스 클리너(earth clean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대로 동그란 구에 기생하는 인간을 모조리 정리하고 난 뒤, 당연한 수순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감당할 수 없는 시체 더미. 전염병 이륙하기 몇 달 전, ‘대규모 이주’로 한창 떠들썩했다. 지식 발전 산증인인 과학자들이 몇 백 년 만에 푸른 행성 지구로부터 3억 7800만Km 떨어진 화성의 자기력을 이기는 연구를 성황리에 마쳤다는 속보가 곳곳에 뜨고, ‘대규모 이주’에 성공하게 된다면.... 단지 미친 과학자 집단의 허상이었다는 팩트는 비로소 우주선을 띄우기 전에 밝혀졌다는..
누구한테 쫓기는 줄 알았다. 용케 안 잡혔더라, 뒤에서 보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너는 모르지? 역시나 몸만 덜렁 와서는 말만 많다. 이야, 그나저나 색 존나 잘 빠졌네.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디? 벅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같이 안 살아요. 아.... 짧은 탄식이 귀에 꽂혀 픽 웃었다. 뭘 웃어, 미안하라고 그런 거냐? 아니요, 어제 형도 할아버지 이야기해 줬으니까요. 답지 않게 화기애애해질 때쯤 늘 윤기를 겨냥하던 회초리 끝이 정국을 가리켰다. 까딱. 야, 잘 갔다 와라. 다리 꼬는 버릇은 어디 안 가고, 태평하게 자리에 앉아 정국에게 손을 흔든다. 조회 시간은 끝났지만, 교실에 남아 복작복작 떠들던 아이들이 교탁 앞에 선 정국을 힐끔 쳐다보았다. 예상보다 담임의 호통은 들을 만했다. 잔소리를 ..
아, 어.... 쩡 굳은 태형의 반응은 곧 정국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푸석거림이 남은 뒤통수를 멀뚱히 쓸었다. 민 지 얼마 안 되어서 손바닥이 까끌했다. 완벽한 갈빛이다. 너, 언놈이... 머리를 그따위로 만들었어. 소중한 흑발! 어디 갔냐고! 파워 쿨톤에 찰떡이던 흑발이! 어디로 갔냐고! 분개하는 태형을 욕실로 겨우 밀어 넣었고, 신발장에 거울을 올려 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미신에 다이소에서 단돈 1,000원을 지불하고 샀던 조그마한 거울로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아직도 그런 미신을 믿어요? 타박할 때는 언제고, 가장 요긴하게 쓰고 있는 건 정국이다. 본인마저 어색함에 몸서리를 치고 만다. 쩡구아, 금방 끝나. 야, 멍청아, 너 부른다고 뒤를 보면 어떻게 해. 하얀 이발소 가운을 몸 앞에 두르고 경..
아가미가 없는 대신, 뚫린 등에 깊은 또 하나의 심해로 큰 한숨을 뱉는 고래. 사람도 크고 많은 한숨을 쉬면서 심장에 조금씩, 조금씩 망연한 블랙홀이 나고 말았겠지. 통증, 괴롬을 모두 탄내 나는 블랙홀에 내던질 수 있다면, 사랑의 그리움까지도. 모닝콜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면 아침이 밝았다는 걸 체감한다. 손길이 닿을 때까지 우는 것을 무심하게 꺼 두고, 눈을 감으면서 귀마저 닫았는지, 미동도 없는 태형을 바라보다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새벽 같은 아침은 몹시 서늘해서, 어제도 했던 같은 고민을 한다. 하복을 입어야 하나, 춘추복을 입어야 하나. 인스턴트로 차린 식사를 해치우고, 더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멍한 몸으로 양치를 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물로 빗고도..
분식집, 망한 옷가게, 생선가게, 반찬가게 등등. 분식집 앞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고, 그 위로 몇 걸음 움직이면 태권도장이 있다. 태형은 운동이 끝나면 땀에 푹 절어서 피아노 학원 입구에 크게 자리한 피아노 구경을 하러 가고는 한다. 면밀히 말하자면, 큰 피아노가 아닌 학원생인 윤기를 보러 가는 거고. 태권도장에 다니건, 피아노 학원에 다니건 또래들이 우르르 몰리는 분식집에서 윤기를 처음 보았다. 하얀색 교복 니트가 유난히 잘 어울려서, 교복 차림에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가 퍽 잘 어울려서 넋을 놓고 떡을 먹다가 눈이 마주쳤다. 잠시였지만 저를 보고 질색하는 얼굴도 잘생겨서, 생면부지인 윤기에게 반했다. 나갈 쯤 거울을 보니 입가에는 양념이 다 번져서는, 더 가관인 건 이에 고춧가루가 꼈더라. 아, 왜..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태형아, 헤어지자. 그래서 부른 거야. 약지를 매만지다가, 딱 들어맞던 반지를 잡아 뺀다. 꽉 쥔 주먹을 가지고 가서 손바닥에 칠이 벗겨지고 만 반지를 쥐어 준다. 이거는, 다른 사람이랑 해. 알겠지? 여느 때처럼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이고 자리를 뜬다. 만남이 없는 이별이다. 반지를 쥔 채로, 공허와 미련이 남아 눈으로 지민을 쫓는다. 옅게 선팅 되어 있는 차창으로 낯선 여자가 보인다. 닳고 닳은 것은 지민과 맞춘 반지가 아니고, 태형이었으리라. 밟고 서 있는 땅이, 푹푹 빠진다. 몸이 무거워서, 아니, 모든 무게를 마음에 쏟고 있느라. 한 방울, 두 방울 회색 아스팔트 바닥이 짙어진다. 눈물인 줄 알았건만, 정수리로..
신기가 있어서, 귀신을 본다고 했는데. 지민은 괜스레 기분이 찝찝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으면 건드리기도 뭐해서.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지민은 옆에 두었던 카메라를 챙긴다. 태형 씨, 버스 왔어요. 태형의 공황을 깬다. 아역 배우로 입지를 넓히고, 국민 남동생에서 국민 연하남으로 등극.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뛰어난 표정 연기, 경력 30년쯤 되는 몰입력. 연기 자체로만 톱스타 타이틀까지 따낸 남자. 물론 얼굴을 빼놓을 수가 없지만. 거품? 인성 논란? 그런 건 모르겠고, 그저 탄탄대로였는데. 지민과 동갑인 신예가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한다. 혜성처럼... 그래, 혜성처럼. 바닥부터 올라오지 않고,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번쩍 등장했으니, 혜성이라는 기명이 퍽이..
아래는 물, 위에도 물. 몸을 마구잡이로 덮치는 물들에 어느 구멍으로 밀려 들어가는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쾌청했던 하늘을 가르는 번개와 천둥이 쾅. 물 밑으로 푹 잠겼다가 눈앞이 번쩍거리고, 한참이나 부족한 공기를 한시바삐 들이킨다. 누군가 아래서 발목을 잡고 있는 듯했고, 아니면 가라앉도록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도 같다. 허파에 생긴 작은 바다가 출렁인다. 몰아치는 파랑, 팔이고 다리고 온몸을 허우적거리는 작은 몸이 감당할까. 흡, 흐악, 헉, 살려, 푸학, 주세요! 살려, 주, 아흑…. 발 닿을 데 없이 깊고, 아득한. 머리 위로 한차례 바다가 퍼붓는 파도. 그리고 푹신한... 이불. 꿈, 꿈이다. 범상치 않은 악몽으로 인해 땀으로 흠뻑 젖고만 머리를 쓸어넘긴다. 이마까지 ..
1. 거센 비바람이 맹렬히도 창문을 때린다. 창틀이 아슬하게 버티며 바람 부딪히는 소리가 괴이하기까지 한 폭풍이 몰아치는 밤. 백 개의 손가락이 한 번에 창을 두드리는 바람에 선잠이 몽땅 달아나 버렸다. 잠에서 깬 김에 바깥에 묶어 놓은 개들을 보러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태형은 문고리에 구기다시피 걸어 놓은 노란 우비를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뒤에 달린 모자까지 야무지게 머리에 쓰고, 곧 몸으로 부딪힐 밤 폭풍에 침을 꼴깍 삼킨다. 어젯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인해 요긴하게 쓰다 신발장에 세워 둔 손전등까지 잊지 않고. 장마철이라고 떠들기에 한껏 기대했건만, 가뭄은 극심해져만 가더니 하늘에서 묵혀 둔 폭우를 한 번에 뿌릴 줄이야. 빗발이 하도 세차서 일부러 작게 연 문인데도 그 틈으로 비가 다 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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