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온도차는 가끔 나를 당황시킬 때가 있다. 김태형은 핫초코를 마신다. 나는 겨울에도 냉수를 마신다. 단내를 폴폴 풍기는 핫초코, 퍽 잘 어울리지. 나는 물을 끓이던 중, 무른 수증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골똘히 생각해 본다. 김태형을 녹이면 여름이 나왔다. 그렇게나 뜨거운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차가운 사람이 아닌데도 김태형의 독보적 뜨거움에, 제풀로 차갑게 식었다. 그래야만 적절한 온도로 김태형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세 번째 눈으로 보아야 최고의 궁합이라는 게, 나는 그게 조금 아쉽다. 사랑에서의 을이었다. 언제나 뒤에 서서 그림자를 밟았다. 같은 위치에 서는 법은 없다. 나는 을이고, 김태형은 윤채가 돌았다. 사실은 기가 죽은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재가 되는 것..
도망쳤다. 씨발. 좁은 모텔, 좁은 침대에서 몸을 구겨 잤다. 섹스 말고, 수면. 옆방에서 격한 소리가, 새벽 내내 들렸지. 누가 비 오고 나면 맑아진대, 머리통 한 대씩 갈겨 주려니까. 떡 치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쌍! 김태형은 내 원수다. 원수랑 같은 침대 위,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저절로 떠진 눈. 피곤했다. 원수는, 입에 내 엄지손가락을 물고서 자고 있었다. 어쩐지 축축하더라. 이렇게 좆같을 수도 없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관이잖아. 손가락을 살며시 빼고, 서랍에 구비되어 있는 새삥 딜도를 입에 물려 주었다. 이 상황에서 발 뻗고 잘도 처잔다. 신기할 따름. 일어나, 김태형. 씻고 나가게. 싸구려 샴푸와 바디워시 냄새. 둘의 몸에서 똑같은 냄새가 진..
도서실 책장 사이에서 키스를 하고는 했다. 원체 책은 관심도 없고, 흥미도 느끼지 못하지만, 동그란 안경에 페이지를 넘기는 곱다란 김태형에게는 흥미 120%. 열없는 김태형, 내 말 너무 잘 듣지. 태형아, 나는 네가 아주 망가졌으면 좋겠어. 통금 시간 여섯 시, 무르익은 분위기를 깨는 좆같은 통금. 겉옷을 챙기며 칼같이 나간다. 열 시에는 보내 줄게, 나랑 있자. 잔뜩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싫다는 말은 안 한다.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아니면 밤새울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김태형은 좀 전에 꿰입은 옷을 벗었다. 교복도. 지금까지 아껴서 먹으려 했는데, 좁디좁은 골반이 예뻐서 안 되겠더라. 들어찬 것을 어디까지 삼킬 심산인지, 아다 주제에 욕심은 많아 몸뚱아리가 흔들릴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처럼, 숨을 쉬고 있어도 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전정국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전정국과 나는 서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섯 번을 헤어졌다가 만났고, 지금도 헤어지고 있는 중. 그거, 진짜 웃긴 새끼다. 헤어지자마자 여자 소개를 받고 다닌다. 이 수법도 통하지 않으니까, 일부러 겹치는 약속을 잡는다. 거기에서 이제, 보여 주기 식 썸을 타는 거지. 뻔하다. 애걸복걸하기를 바라는 거다. 정국아, 형이랑 다시 만나자. 듣고 싶어 하니 한 번쯤은 해 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놀리고만 싶은지. 최고로 웃긴 게, 늘 미안하다고 잡는 건 전정국이다. 이런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다가 여든아홉 살이 될 것 같..
이거 너무, 하이퍼 리얼리즘이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음악 들으면서 울고, 영화 보면서 울고, 고민 자랑 프로그램 보면서 운다. 슬픈 이야기는 다 내 일 같아서. 하나. 울고 싶다고 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핑계거리를 만든다. 둘. 나를 투영해서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 천지고, 그러므로 나 정도면 불쌍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 불쌍함 자격증을 딴다면, 9급은 되지 않을까. 저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흙으로 만든 쿠키로 끼니를 때우는걸. 보통, 사랑을 시작하겠다고 해서 사랑하나? 오후 여덟 시 사십 분부터 너를 사랑할 거야. 물론 있기야 하겠지, 소수를 응원한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도 꽤 걸린다. 금사빠 님들 제외. 그 중에서도 내가 걔를? 설..
분리 불안과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 마냥 내 사랑을 갈구하는 김태형. 애정에 목말라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옭아맸다.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나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어린애 같은 김태형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태형아,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너를 좀스럽게 갉아먹는 건 누구야? 김태형은 어딘가 불안했다. 불안한 만큼 살을 비벼 왔다. 섹스로 사랑을 확인했다. 그에게도 단출하고 소소한 취미 생활이 있는데, 예쁜 속옷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 취미가 생긴 이유도 바로 나다. 충분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김태형은 스스로 납작한 가슴 위로 브래지어를 채우기도 한다. 채워 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풀어 주는 걸 더 좋아하는, 앙큼한 김태형. 잦은 외출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겨진 빈집에서 칼로 ..
전정국에게 나는, 끽해 봐야 죽은 애인을 대신한 닮은 사람. 발버둥치고, 죽기 살기로 다리에 매달려도 딱 거기까지다. 추적추적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흙탕물에 구르며 비참해질수록 순정은 빛을 냈다. 김태형의 순정은, 빛내다 못해 발화한다. 호모 포비아였으므로, 철저하게 숨겼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둥, 알아챌 수 없도록 가장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목젖이 타는 것 같아서. 어, 자격지심에. 그럴 때마다 전정국은 응원해 줬고, 투정은 덤이었다. 왜 형만 연애해요, 나랑 이어 줄 사람은 없어요? 너무하네. 너를 사랑하려면 너무해져야 했다. 내가 더럽게 치사하고, 너무해 봤자 너는 못 따라가. 얼마 안 돼서 여자 친구 생겼잖아. 너는 이미 승리자였는데, 기어코 뭉툭한 발꿈치로 작아진 나를 짓뭉..
그럭저럭 추억할 만한 학창 시절이었다. 적당한 친구들, 겉 친구 같은 건 내가 싫어서 만들지 않았다. 등교 거부도, 글쎄. 내가 따라다니던 후배 전정국도. 천체 관측 동아리였다. 지금도 천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렸을 적 눈을 감고 우주를 생각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외계인도 믿었고, 유에프오도 믿었다. 매일매일 별을 하나씩 만들어냈다. 크기도 작고 발광도 위태로웠지만, 가장 사랑했다. 눈을 감은 검은 도화지에 형형색색 은하수을 쏟았다. 도화지를 겹겹이 붙이면 내 우주가 되었다. 젊음의 향유였다. 전정국과는 동아리에서 만났다. 신학기, 신입생 중 딱 한 명이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다들 우리 동아리는 지루하다고 기피하던데. 특이한 애라고 생각했다..
우리, 징하게도 붙어 다녔지. 지금처럼 홀로 남겨진 시간에도, 네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여전히 코끝에 남아서, 나를 파고들어. 지배당하는 것 같아, 태형아.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후 완전한 외톨이가 되었다. 깨지는 접시를 보면서 내 인생이 깨지는 것 같다, 우스갯소리를 열 올리며 싸우시는 두 분 몰래 중얼댔었는데.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사회적 인식이 너무나도 후졌기 때문에, 나는 부모 잃은 새끼라고 꼬리표 달리는 게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나 같은 애 하나가 더 있었는데, 애들이 대놓고 손가락질하고 그랬거든. 그래서 이모에게 전학을 부탁했다. 짐짝이 요구하는 것도 많네라는 얼굴로 못 이겨 알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났다, 김태형. 미안하게도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솔직하게 ..
장전할 줄도 모르는 권총을 가지고 다닌다. 그 자체로 드는 위화감 때문에, 어린애들 호루라기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편이 훨씬 나았을걸. 그래도 김태형이 유일하게 총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 총 돌리기. 내 손 위에서 자유자재로 굴려지는 총을 보고 눈을 빛낸 게 시초였다. 무게가 꽤 나가는 총으로 온종일 손장난을 치더니, 뽀르르 나에게 와서 이것 좀 봐 달라고 떼를 썼다. 나왔다, 집중하는 입술. 다음부터는 무리가 가지 않도록 22구경의 권총을 테이블에 뒀다. 슬쩍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작고 가늘은 손목이었기에. 정국아, 이거 네가 둔 거지? 조용히 넘어갈 줄을 모른다, 김태형. 거리는 이미 쓰레기들로 넘쳐나 숨이 막혔다. 트이지 않는 시야와 썩은내로. 상대적으로 이목구비가 붙어 있는 쓰레기..